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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Oct 18. 2023

풍경 밖에서 나를 보면

열아홉스물에 대한 편지, 유희

나는 나 자신의 풍경

나의 지나감을 지켜본다.

   - 페르난두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 지성사

     

   가끔 어떤 시는 제 감정을 더 잘 아는 듯합니다. 감정에 대한 정확한 말을 몰라 답답할 때 시집을 꺼내면 비로소 제 감정의 이름을 찾은 듯 기쁘기도 하고요. 페르난두 페소아의 몇 개의 시는 좀처럼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을 대신 말해주어 자주 펼쳐보고 있습니다. 어떤 시는 필사를 하기도 하고요. 시를 종이에 꾹꾹 눌러 적다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작정하지 않으면 느끼기 힘든 감정입니다. 


   아마 ‘나는 살아 있나?’ 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한 건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었을 때 그 기억을 강렬히 기억하기도 하고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하지요. 저는 후자에 가까워서 열아홉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드문드문 머릿속에서 저를 지킬 몇 개의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기억 속 열아홉 시절은 가위로 잘린 채 갑자기 스무 살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나의 '살아 있음'을 자주 확인했던 것 같고요.


   스무 살 겨울은 추웠습니다. 짐이랄 것도 없이 옷 몇 가지만 챙겼는지 아니면 커다란 가방에 온갖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을 나섰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강원도에서 안산으로 서둘러 도피하고 싶었습니다. 집에서 떠나는 것. 매일 술에 취해 있는 엄마 곁을 떠나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저의 오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에게는 언니가 있는 안산에서 일을 하고 돈을 모아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면 집으로 오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엄마 곁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내내 바라던 순간을 마침내 마주하자 슬프고 두려웠지만 살기 위해 그렇게 마음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 ‘안산행’이라고 적힌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열아홉 겨울방학의 일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언니가 월세를 내며 지내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방 두 개, 거실 겸 부엌, 작은 화장실이 있는 오래된 빌라였고요. 그 집에는 언니와 언니의 친구 둘, 그리고 언니의 친구 동생까지 총 네 명이 있었습니다. 제가 오자 좁디좁은 집에 여자 다섯 명이 살게 되었고요. 작은 집이었지만 욕실에서는 따듯한 물이 나왔고 추울 때는 보일러를 켤 수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 먹거나 참치 통조림을 사다가 밥과 먹을 수 있었고요. 따듯한 집에서 따듯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자체로 저에게는 훌륭한 집이었습니다. 저는 이십 대를 앞두고 있었고 언니들은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강원도에서 올라와 도시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십 대 마지막 겨울과 이십 대의 첫겨울을 안산에서 맞이했습니다. 언니가 다니던 직장에서 휴대전화 기판에 들어가는 기판의 불량을 현미경으로 찾아내는 일을 하면서 말입니다. 아침 일곱 시에 집에서 나와 밤 아홉 시까지 비슷한 모양의 기판을 들여다보는 일. 눈이 빠져라 일을 하고 나면 힘들었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 3월에는 합격한 대학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습니다. 등록금에 대한 부담으로 국립대학교에 지원했고 등록금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방학 두 달 동안 일하고 받은 월급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언니와 함께 살던 월세 집의 생활비도 함께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진 돈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생활도 위태로워져 대학은 당연히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스무 살 봄,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안산에 있는 제약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저는 돈이 제일 간절했고 두려웠습니다. 천 원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아 약간의 생활비를 제외한 돈은 모두 저축했고요. 지금 생각하면 스무 살짜리가 참 힘들었겠다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고생스러움이 이경 씨, 그리고 지금의 제가 되기 위한 풍경이었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 등록금을 벌고, 대학에 가지 못하고, 다시 직장을 구한 후 일을 한 것이 스무 살 시절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힘들게 지원해서 가게 된 대학을 돈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괴로웠지만 덕분에 사회생활도 일찍 하게 되었고 저와 더 맞는 대학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경 씨처럼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고요. 힘든 일도 좋은 일도 지나고 나서 볼 일입니다.


   드문드문 기억이 떨어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모아 이경 씨에게 편지로 보낸 후 기억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풍경화 하나를 멀리 떨어져서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도 이렇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별 거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렇게 씀과 동시에 밀어냈습니다. 힘든 기억을 모아서 적고 ‘별 것 아니네.’ 하며 스스로 위로해 줄 수 있는 힘. 제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런 글쓰기를 이경 씨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요. 저와 같은 연필을 붙잡고 있는 이경 씨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가벼워져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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