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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Oct 18. 2023

회색 밖으로 걸어 나가면

안산에 대한 편지, 유희

   이경 씨, 어느덧 우리의 이야기가 이십 년을 훌쩍 넘어 이십 대 초반 우리가 만난 시절에 왔습니다. 제가 스물둘, 이경 씨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우리는 처음 만났지요. 안산에 있는 대학교에서 말입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들어가고 난 이후에도 무엇이든 되어보려고 부단히 애쓰던 기억이 납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제가 직장 생활을 하며 번 돈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성실하게 학교 수업을 들었고요. 이경 씨가 앳된 목소리와 얼굴로 저에게 인사하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대학 시절, 단 둘이 커피 한 잔 마신 적 없던 사이이지요. 하지만 이 편지를 계기로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으니 이 시간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저에게 안산은 특별합니다. 고향을 떠나와 살게 된 곳도 안산이고, 다니던 직장도 안산이고, 직장을 그만둔 뒤 다니게 된 대학도 안산에 있었으니까요. 더구나 안산에서 살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여 안산에서 아이까지 낳았으니 안산은 이제 저와는 떼려야 뗄 수 관계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래서 안산은 제게 애틋한 도시입니다. 이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새로운 가정까지 이루게 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저도 이경 씨처럼 처음에는 안산을 회색의 도시로 생각했습니다. 회색 공장 건물과 회색 공장 연기, 회색의 작업복, 회색 비둘기. 이런 이미지들이 안산을 떠올리면 함께 떠올랐으니까요. 저의 감각 중 제일 예민한 후각으로 안산을 떠올리면 이런 이미지들이 한데 섞인 냄새가 떠올랐고요. 그리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반월 공단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저는 이 회색 안으로 들어가는 회색의 사람이 되는 듯했습니다. 

  반월 공단으로 버스를 타며 출퇴근을 할  때 차창 밖으로 많은 회색의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초록의 산과 갈색의 논과 밭, 색색깔의 열매를 보며 자란 제게 창 밖의 이미지는 낯설기만 했습니다. 왠지 쿨럭거리며 기침이라도 할 것 같은 메마른 가로수, 음식물 쓰레기 주변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모여들던 비둘기, 비슷한 모양의 회색 건물들은 생기 없는 풍경화 같았습니다. 공단으로 들어가는 차들은 항상 많았고, 버스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돈을 번다는 목적 하나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회색 공단 안으로 계속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쯤 강력 범죄 같은 일들이 안산에서 일어나면서 안산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왠지 제가 모욕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아직도 안산 하면 좋지 않은 여러 일들을 떠올리며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안산을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안산에서 지낼수록 회색의 이미지들이 이 도시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공단을 벗어난다면 시골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산도 있고, 그 산속에는 다양한 울음소리를 내는 새도 있습니다. 곳곳에 있는 공원은 소풍 같은 산책이 가능할 만큼 멋지고요. 매 년 5월이면 열리는 거리극 축제도 근사합니다. 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편의 시설도 잘 되어 있으며 낮에는 한가롭기만 합니다. 안산도 여느 도시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평범한 도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이경 씨와 시간을 나눈 안산에서 조금 있으면 유치원에서 돌아올 아이를 기다리고 이 있습니다. 아직 해가지지 않았습니다. 집 앞에서는 낡은 빈집을 부수는 소리가 들리고요. 구름은 듬성듬성 떠가고 바람은 나무를 한쪽으로 끌어당깁니다. 환한 대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입니다. 이 십 대 초반, 옷 몇 벌만을 들고 왔던 열아홉 살의 고등학생은 이제 버릴 짐이 많은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이경 씨와 제가 함께 학교를 다니던 때와 다르게 안산도 많이 변했지요. 변화하는 것이 때때로 슬프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저 이경 씨와 지난날의 안산을 추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기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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