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 Jul 22. 2023

우리가 있던 회색 도시

안산에 대한 편지, 이경

    어떤 것에 대해 설명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 도시에 대해서는 색으로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저는 가장 먼저 회색을 떠올립니다. 안산을 생각하면요. 때로는 희멀겋고 때로는 잿빛에 가까운 회색입니다. 이상하게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곳에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너무 많이 타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지하철에서 또 다른 호선의 지하철로, 그리고 다시 한번 버스를 타게 되면 밖을 스쳐 지나는 풍경보다 제 몸이 있는 공간이 뚜렷하게 남습니다. 시멘트로 지어진 지하철 역사와 난연성 플라스틱 지하철 의자, 버스 의자의 뒤판 같은 것들 말입니다.      


    혹은 첫인상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매일같이 그런 과정을 거쳐 안산에 갔던 이유는 우리가 함께 다녔던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였고, 그보다 앞서서는 입학을 하기 위해 필기시험과 면접에 통과해야 했습니다. 지역 내의 한 고등학교에서 필기시험을 치렀고 이후에는 본교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두 번의 시험날 모두 날씨가 흐렸어요. 어둑한 가을이었죠. 시멘트 바닥에 울려 퍼지던 의자 끄는 소리와 땀이 배어 축축해진 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시험지 한 구석도 손의 땀 때문에 우글우글해졌던 것 같습니다. 긴장과 불안으로 흐릿하게 그린 도시의 풍경은 면접날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예정된 시간에 빠듯하게 도착한 덕에 처음 보는 건물을 뛰어 올라가는 동안 본 건물은 온통 회색, 복도도 회색이었습니다. 면접장 앞 대기석에 앉아 있는 동안 저는 바닥을 보며 숨을 골랐고 금세 들어간 면접장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앞에 계신 다섯 분의 교수님들은 제가 더듬더듬 말을 하는 내내 표정이 없다시피 한 얼굴이었던지라 조금 절망스러워했던 기억만 납니다. 결국 면접을 보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한참을 우울해하고 찔끔 눈물도 흘렸던 것 같습니다. 차 안에서 보는 하늘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우중충했죠.      


    다행히 합격운은 있었습니다만 시간표를 짜는 운은 없었던지 거의 매일 같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등하교를 하곤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끼니를 밖에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학생식당과 학교에 바짝 붙은 식당과 카페를 애용했고 시간이 넉넉한 날은 중심지까지 나가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이십 분 정도 걸어 나가면 볼 수 있는 거대한 상가들은 온갖 색의 간판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지만 저는 늘 간판 뒤에 숨은 건물의 벽을 보곤 했습니다. 그 상가들을 돌아다니며 떡볶이와 소주, 칵테일이나 맥주에 튀긴 닭고기 같은 것을 먹었죠. 카페로 향한 적은 더 많고요. 몇 번은 노래방도 가고 영화도 보러 갔습니다. 건물에서 건물로, 회색에서 다시 회색으로요.   

   

    그러나 거기에서 생각을 이어가면 연둣빛과 강렬한 붉은색이 곧 뒤를 따릅니다. 잔디가 빼곡하게 덮여있던 둥근언덕을 유희씨도 기억하시지요?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혹은 재미로 한 바퀴 구르거나 그냥 걸터앉아 수다를 떨거나 무언가를 먹던 그 동산 말이에요. 


    거대한 회색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소담한 가로수들도 기억이 납니다. 정문에서 학교 안까지 올라가는 길은 내내 오르막이라 유독 긴 것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해가 강하게 나던 여름날이면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과 작은 그늘을 방패 삼아 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교정 안에 들어서서 빨간 다리가 나오면 숨을 고르는 것이었죠. 


    빨간 다리, 그러니까 새빨간 페인트로 칠한 철골 구조물과 유리벽으로 만든 그 도서관 건물에서 유희 씨를 우연히 만나게 될 때면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입어본 과복에도 붉은색이 있었죠. 학교의 심벌이었던 타오르는 불꽃 모양이 학과명과 함께 프린팅 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등판에 붙어있던 그런 모양이 가슴속에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온통 학교와 관련된 기억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삼 년은 오갔던 도시를 이렇게 협소하게 기억하는 일이 민망하기도 하다가 애틋하기도 합니다. 유희 씨의 안산은 저의 안산과는 또 다르겠지요?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우리는 이제 처음으로 완전히 같은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겁니다.                     

이전 12화 풍경 밖에서 나를 보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