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스물에 대한 편지, 이경
유희 씨, 혹시 인물 사진을 보정할 때 주의할 점을 아시나요? 사진 일부분을 잘라내야 할 때 관절 부위를 자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손목, 발목, 허리, 무릎과 같은 곳을 말이죠. 만약 그런 부분을 자르면 정말로 몸이 댕강 잘린 것처럼 사람이 화면 안에서 둥둥 떠 보여서 무척 어색해 보이니까요. 저의 열아홉과 스물을 생각하면 꼭 그렇게 잘못 잘라버린 인물 사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도둑질을 당했습니다. 청소 주번이라 쓰레기통을 비우고 교실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사라졌던 것이죠. 아이들이 전부 가고 난 텅 빈 교실에서 가방과 책상, 사물함을 뒤지고 교실 바닥도 샅샅이 훑었지만 나오는 것은 먼지와 쓰레기뿐이었습니다. 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교실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은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었습니다. 춘추복을 혼용해 입던 그 시기는 유난힌 서늘한 날씨였습니다.
집에 가서는 혹시 내가 어디 떨어뜨린 걸까, 아니면 정말로 훔쳐간 것인가 하며 부모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몇 번씩이나 걸었습니다. 이틀은 아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웃음 표시 이모티콘과 함께 핸드폰을 돌려받고 싶으면 자기가 말하는 시간에 말하는 장소로 나오라는 내용의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덜컥 겁이 났던 저는 엄마와 함께 해당 지역의 지구대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동행을 요청했습니다. 족히 삼십 분 정도는 길거리에 서 있었지만 나타나는 사람도, 연락도 없더군요. 전화를 받지도 않았고요. 그늘 하나 없이 뜨거운 가을볕을 그대로 받고 있던 엄마의 관자놀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그걸 지켜보는 저의 정수리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엄청나게 환했는데도 곧장 땅속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죠.
저는 고민 끝에 통화 기록을 뽑고, 잃어버린 기간 동안 제 핸드폰으로 자주 연락한 번호 몇 개를 추려서 같은 학년 아이들 연락처 중에 그 번호가 있는지 확인하기를 택했습니다. 교무실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간 날 마침 교감 선생님이 근처에 있던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요. 그런데 정말로 그 번호를 사용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몇 번의 면담 끝에 공통적으로 지목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였죠. 그 아이는 제가 핸드폰을 도둑맞은 것 같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하냐고, 대체 누구냐고 함께 걱정해 주기도 했는데 말이에요. 저는 놀랐고 그 애는 설마 이렇게까지 찾을 줄 몰라서 더욱 놀랐던 것 같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그 애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핸드폰은 제 것인지 모르고 가져가서 며칠 쓰다가 학교 근처 상가의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더군요. 담임 선생님은 그 애 엄마를 호출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사건은 두 모녀가 저를 앞세우고 저희 집에 함께 들러 엄마에게 사과를 하고 핸드폰 대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며칠 뒤에 담임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불러 한 말은 그 애 엄마가 저희 집에 다녀온 이후에 '어려워 보이는 집에서도 아이를 참 잘 키우셨더라'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뭐라 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제 앞에서 담임 선생님은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른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넘어가자고도 했었죠. 범인이었던 그 애도 입을 다물었고 반 아이들 역시 제게 그 사건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아마 몰랐거나 대충 이야기를 알지만 당사자들도 안 하는 이야기를 굳이 아는 척 하기는 민망하니까, 아니면 자기 공부를 챙기기에 바빠서 그랬을 테지요.
저는 그 애와 그 뒤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동안 유난히 높은 그 애의 웃음소리를 듣기 싫어서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박차고 나가거나 차마 넘어가지 않는 밥을 잔반통에 버리고 급식실을 나오곤 했습니다. 저는 교실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이상하게 둥둥 떠보였을 겁니다. 그게 최선이었음에도 말이지요.
어쨌든 저는 그해 수능까지 치르고 스무 살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들어간 학교에서 엉겁결에 반 대표를 맡고 학생회에도 들어갔지요. 실습 시간에 쓸 도구를 챙기고, 낯선 기호를 외우다가 과사에 들리고, 과방에 동기들과 모여 앉아 선배들이 말하는 것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는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꾸며본다고 딱 붙는 바지와 재킷을 입고 나갔다가 집에 돌아온 날은 숨을 헉헉 몰아쉬기도 일쑤였고요. 그러나 저는 오월에 그 학교를 나왔습니다. 전공도 학교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였는데 사실은 어색해 보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제풀에 지쳐 탈진했던 셈이지요. 사진을 다듬는다고 자르고 또 자르려다가 결국 남길 것 없을 정도로 만들어버렸던 셈입니다.
처음부터 사진을 잘 찍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인생의 매 순간이 한번 찍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진으로 남아 쌓입니다. 들춰보며 미진한 부분을 자꾸 찾고, 또다시 닥쳐오는 생의 순간에 미진한 구석을 잘라 내보려는 시도는 자주 실패하고 있습니다. 열아홉 스물의 제가 그랬듯 서른이 넘어서도 저는 여전히 그렇습니다. 자꾸 쌓이는 사진들을 보며 울다가 웃다 하품하며 진저리 칩니다.
하나 다행인 것은 유희 씨와 편지를 나누며 평생 끝나지 않을 이 과정을 끝내는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함께 찍어가는 사진이 당신에게도 가능한 덜 잘라내고 싶은 것들이면 좋겠습니다. 유희 씨, 늘 고맙다는 뻔한 말을 또 이렇게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