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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Jul 15. 2023

그 옷에서 흘러온 이야기  

교복에 대한 편지, 이경

    도시가 비에 흠뻑 젖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행히 재택근무를 자주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에 일 때문에 외출할 일이 생기면 더욱이 무엇을 입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옷장에 옷을 쌓아 놓고도 입을 옷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몸매가 좋다면 아무 옷이나 입어도 추레하지 않고 시원하게 입을 수 있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저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평범한 직장인 정도로 보이기 위해 여러 차례의 옷을 입어보고 매무새를 다듬고 액세서리를 뺐다 꼈다 해야 합니다. 노력에 비해 결과는 초라할 정도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회사에 소속되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일을 진행하다 보면 체형은 물론 옷, 액세서리 등의 상태 역시 저에 대한 평판을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됩니다. 썩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주 휘둘리고 맙니다. 전체적인 느낌부터 얼핏 느껴지는 소재와 마감, 세탁 상태, 브랜드 등등이 내포하고 있는 것들을 자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교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합니다. 저의 첫 교복은 초록색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약간 어두운 초록색 재킷에 푸른색이 섞인 체크무늬 주름치마, 조끼 그리고 묘하게 푸른빛이 도는 흰 셔츠 구성이었지요. 어떤 아이들은 메뚜기 같다며 자조 섞인 표현을 하곤 했어요. 중학교 입학식을 했을 때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교실에 앉아있었던 모습을 보며 새로운 곳에 왔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낀 기억이 납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잘 구분되지 않는 낯선 사람들 중 하나가 됐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 앉아있던 아이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을지는 모르겠어요. 입학식 이후 깨달았던 것은 집단에서 개인으로, 은밀하게 살아남는 방법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완벽히 같은 것은 교복뿐이었는데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이전에는 겪어본 적 없이 빠르게 변해버리는 그 시기가 두려워서였을까요? 저 역시 빠르게 다른 아이들과 공통점을 찾고 테두리 안에 머무는 순간에 안도하곤 했습니다.      


    1학년 2학기 겨울방학 직전, 반 전체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견학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앞에서 집합하는 형식이라 알아서 찾아가야 했죠. 함께 가기로 한 친구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저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갔었는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이어서 불안함에 시달리고 있었지요. 이미 늦어서 그랬는지 지하철에서 아는 얼굴을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주변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마다 다른 옷을 입은 어른들밖에 없었습니다.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사람이 있었는데도 열차칸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저는 교복 재킷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내릴 역에 도착할 때까지 안내 방송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요. 

    

    열차에 내려서도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둘러봤지만 저와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쩐지 다급한 마음이 들어 저는 계단을 총총 뛰어올라 개찰구를 지나 출구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아, 그러자 저 앞에 저와 같은 교복을 입은 무리들이 보였어요. 간간이 교복 위에 코트나 점퍼를 걸쳐 입기는 했지만 초록색 재킷과 체크무늬 치마는 숨길 수 없이 빼꼼 마중 나와 있었죠. 한쪽에는 같은 반 친구들이 서 있다가 저를 발견하고 빨리 오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잰걸음으로 걸어가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나서 오지 않은 아이들을 기다렸지요. 그 와중에 두어 명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미리 써왔다며 나누어 주었습니다. 카드에는 겨울방학이 지나 다른 반이 된다고 해도 계속 친하게 지내자는 이야기가 꾹꾹 눌러 적혀 있었는데, 그때 그 아이들의 다정함은 몇 해 간 제게 큰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교복을 벗으며 깨달은 사실은 제가 옷 한 벌로 동질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절이 영영 지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변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어필하면서도 어떤 모습을 통해서는 유일한, 그러면서도 쓸모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알려야 했지요. 교복의 핏을 수선하고 몰래몰래 사복을 더해 입으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어떤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보다 훨씬 교묘하게, 자연스럽게 굴어야 했지만요. 과정은 지난했고 지금도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옷을 여러 번 갈아입게 될 겁니다. 늘 그랬듯 무엇을 선택할지는 닥쳐봐야 알게 될 텐데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새로운 조합을 찾는 일이 지겹지 않을 것 그리고 제게 어울리는 것을 찾았다는 기쁨이 또 찾아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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