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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채집

< 시적 사물: 노트 >

by 모카레몬
시.jpg



오후라고 하기엔 이른 낮


아끼는 노트를 들추어보던

그날은 햇빛이 쨍쨍했다

따갑기까지 했던 빛살을

기억하는 것은


아직까지

그토록 날카로운 빛줄기를

맞은 적 없다는 생각


한 번도 마지막 장을 이어서

쓰지 않았고

이삿짐 속에서

공책 묶음만 늘어났다

다른 공간에서도 반복하는 제자리


썼던 것들은 버려지거나

잃어버려도 모를 사이

저녁 갈치 굽는 냄새가 퍼지면

눈가 근처, 노을빛처럼 가라앉던 한때


이런 글이 무슨 쓸모가 있을지

봉합하듯 구석으로 몰아넣었지

잉여로 흘러넘친 문장들처럼

정신도 묶였었지


그러나


다시 노트를 펼친다

새 숨으로 종이 귀퉁이가 들리고

햇살은 다른 모양으로 들어온다


쓰지 않은 여백엔

아직 부르지 못한 노래들이

서성이고


빈칸이 열어젖히는

다음 장의 문턱


새롭게 쓰일

언어의 비늘들이

고요히 부유하고 있다




이것도 시냐고

썼다 지웠다, 버렸다 살렸다 했던

어린 시간들을 부릅니다.

펼쳐보니 쓰여지지 못했던

소리와 말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다시,

새로운 여백에

모았던 소리들의 씨앗과

매일 줍는 배움의 말들을 데리고 옵니다.


곧 빛을 받아

따사로운 노래로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1:3)



글벗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진. pixa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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