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결혼의 어려움은 평등하다. 권력이나 재산이 많다고 결혼의 어려움을 피해갈 수 없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이재용 삼성 부회장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결혼의 갈등에 봉착했다. 돈이나 권력으로 결혼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묘약을 살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죽음과 마찬가지로 결혼 속 갈등은 기혼남녀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결혼의 풍경이 사람들마다 제각각인 건, 다양한 환경적 변수와 함께 갈등 해결 능력이 부부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길다. 예전 한 노문학과 교수도 ‘톨스토이의 소설은 어려워서 안 읽는 게 아니라 두꺼워서 안 읽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혼과 사랑에 관한 내용 외에도 사회적 문제나 예술과 신앙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녹여낸 결과다. 레빈의 내면적 독백이 주를 이루는 8부를 읽다 보면 마치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 완독의 영예를 아무에게나 주지 않으려고 심어놓은 난관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평이한 문체로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산에는 만족하지 않으나 자신의 지능에는 만족한다’는 식의 촌철살인을 툭툭 던지는데, 대부분이 1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씌체르바쓰키, 코즈느이쉐프, 보즈드비줸스코예같은 낯선 단어 속에서도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건, <안나 카레니나>가 사랑과 결혼이라는 인류 보편의 관심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두 결혼이 소개된다. 안나의 결혼, 레빈의 결혼. 안나는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져, 알렉세이와의 결혼을 끝낸다. 브론스키 덕에, 안나는 자신이 알렉세이를 사랑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레빈은 오랜 기간 키티를 짝사랑했고, 결혼에 성공한다. 안나의 사랑과 결혼은 격정적이었으나 불행했으며, 레빈의 사랑과 결혼은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사랑)은 왜 달랐던 걸까. 안나와 브론스키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단서를 찾아본다.
이 어린애의 동석은 브론스키의 마음에도 안나의 마음에도 일종의 감정, 즉 자기가 지금 굉장한 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 방향이 마땅히 가야 할 방향과는 동떨어진 것임을 나침반에 의해 알고 있으면서도 진행을 멈출 힘이 없어 점점 더 멀어져 가 마침내는 이 멀어짐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자인하고 마는, 말하자면 길을 잃고 말아도 별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기에 이른 항해사가 품는 것과도 흡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1권, P.366)
결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갈등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인본주의 혁명 이래로, 결혼은 내면의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자연히 결혼의 핵심 요소는 사랑이란 감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원한 사랑’이란 낭만주의적 인식이 결혼에 덧입혀졌고, 사람들은 결혼을 영원한 사랑의 결과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린 현대 과학의 발달 덕분에, 사랑이라 불렸던 숭고한 감정이 사실은 뇌하수체에서 나온 호르몬의 작동 결과였음을 알고 있다. 안나의 사랑이 의지와 무관하게 솟아올랐던 것처럼, 감정은 호르몬 분비가 끝나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요소다.
그런데 많은 부부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감정에 얽매인다. 왜 연애 초기의 감정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냐며 서로를 비난한다. 그러면서 부부 사이 갈등의 모든 원인을 감정의 변화-열정적 사랑이 식어버린 상태-에 돌리려 한다.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만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그건 마치 ‘왜 네 흰머리는 연애 초기보다 늘었냐’고 비난하는 거와 다를 바 없다. 모든 사랑의 감정 다발은 변한다. 그럼에도 결혼이란 '제도적 안전장치'를 얻지 못했던 안나는 특히 더 감정에 의존했다. 브론스키의 마음이 식어버린 순간, 자신은 곧 버림받게 될 거라 두려워했고, 그래서 더더욱 브론스키의 감정에 집착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어요?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나를 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것뿐예요.” 그녀는 그가 미처 다 말하지 못했던 것까지 전부 헤아리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녜요.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예요. 내가 정말 바라고 있는 것은 사랑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이젠 없어요. 그러니 이젠 모두 다 끝장이 나고 만 거예요! (3권, P.379)
시간이 흐르면 열정적 감정은 사라진다. 이제 부부는 사랑이란 감정이 사라진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야 한다. 바로 사랑이 남긴 유산이다. 스퐁빌은 ‘도덕은 사랑을 명령하는 대신, 사랑이 있었으면 자발적으로 할 일을 의무로 이행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즉, 사랑할 때 생겨났던 자연스러운 도덕적 생각-파트너에 대한 성실, 감사, 배려, 겸손, 관용, 정직, 자비 등등-을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어가야 한다. 안나는 ‘존경이니 하는 말은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버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생각해낸 것뿐’이라고 지적했지만, 레빈의 부인 키티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존경은 열정이 사라진 자리를 채울 훌륭한 미덕이다.
결혼은 원래 어려운 거다. 결혼 초기 레빈과 키티가 겪는 갈등은 누구나 피하기 힘든 과정이다. 완전히 독립적인 두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결합하는 일이 간단할 리 없다. 하여 결혼 초기, 많은 부부들이 레빈과 키티처럼 일종의 시행착오를 겪는다. 레빈은 결혼 초기를 호수에서 배 타기에 비유한다. ‘그저 보고만 있을 때에는 손쉬운 것 같았지만 막상 자기가 해보니까 썩 즐겁기는 해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2권, P.474) 레빈은 알게 된다. 결국 결혼 초기 서로의 세계를 하나둘 맞춰가는 과정은 상당 부분 이성적 노력에 기대야 한다. 결혼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모든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불만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그 불만의 원인에 대해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그중에서도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탓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2권, P.486)
이리하여 그를 질투하면서 안나는 그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온갖 것에서 원망의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자기 처지의 모든 괴로움을 한 사람의 탓으로 돌렸다. (3권, P.371)
스스로 열반 경지에 도달해 마음의 평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부부는 종종 부딪힐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우린 불만의 원인을 끊임없이 찾으려 하는데, 그 과정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그저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화살을 쏘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끝나지 않을 갈등을 계속해서 해결해 나가는 연속이다. 갈등 해결의 기술이 원숙해질 수 있을지언정, 갈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갈등 해결 기술의 원천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영역이다. 사랑의 호르몬이 만병통치약처럼 갈등을 치유해주길 기대하는데서 거의 모든 갈등의 곪음이 시작된다. 이성을 발휘해야 한다.
글을 쓰고 나니 스타트렉의 불칸족이 돼버린 기분이다.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라도 공부의 과정이 늘 즐거울 수 없다. 그런 학생에겐 공부의 어려움을 이겨낼 조언이 유효하다. 하지만 공부 자체가 싫은 아이에게 공부 조언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다. 관계를 이어갈 의지가 없다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의지는 물론 감정에서 비롯된다.) 결혼을 앞둔 레빈에게 독신 친구들이 찾아와 곰 사냥을 못 갈 텐데 어쩌냐며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레빈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의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레빈은 빙그레 웃었다. 마누라가 자기를 보내주지 않으리라는 상상이 몹시 즐거워서 그는 곰을 보는 만족일랑 이제 영원히 물리쳐버려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권, P.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