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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카토 Aug 27. 2017

연인과 효과적으로 대화하는 방법

이언매큐언 <체실비치에서> <칠드런액트>

     끓어오르는 욕정을 극한의 인내로 견뎌내던 시절엔, 결혼만 하면 욕구 해소의 프리패스를 얻게 될 거라 믿었다. 포르노로 성을 접해서였을까. 곁에 애인이 없어서 욕구불만이 생기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패러다임엔 하고 말고의 문제만 있을 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사실 ‘몸으로 하는 대화’는 좀 더 원시로 돌아가는 본능 회귀가 아니다. 고난도 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은 동물이 아닌지라 욕구 해소만 하면 그만인 존재가 아님에도, 언어가 배제된, 몸으로 하는 대화법엔 여전히 낯설다.


    물론 종족 번식 본능을 무시할 수 없다. 문명화된 인간의 역사는 인류가 지구 상에 머물었던 전체 역사 중 매우 짧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인류는 몸으로 나누는 사랑을 종족 번식이란 일차원적 목적에서 해방시켰다.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과 맺는 관계는, 상대에 대한 보다 고차원적인 이해랄까, 궁극의 이해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빛을 발휘하는 소통의 일부가 됐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한다. 욕구 해소란 단세포적 욕망에 허우적거리는 본능적 인간과 고차원적 소통 방식을 익혀야 하는 문명 속 인간의 충돌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성인은 고난도 육체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습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욕구 매니지먼트도 실패하기 일쑤다. 전적으로 교육 부재 탓인데, 다행히도 이와 관련된 탁월한 강사가 있다. 영국의 소설가 이언 매큐언. 남녀 관계의 미세한 엇갈림을 수려한 문체로 포착하는 분이다. 특히 이언 매큐언은 그 엇갈림을 남녀의 육체적 관계 속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고난도 육체 커뮤니케이션의 텍스트북이 전무한 현실에선 적확한 강사라 할 수 있겠다. <체실 비치에서>는 그중에서도 기본적인 정통 입문서다. 20세기 초반의 신혼부부, 그들이 겪는 첫날 밤의 비극이 소설의 전부다.


    <체실 비치에서>의 첫 문장은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다’지만, 주인공 에드워드는 성에 대한 보수적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고, 또 다른 주인공 플로렌스 역시 성에 관한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결국 두 명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연인은 고난도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만다. 심지어 그 실패는 영원한 결별로 이어진다. <체실 비치에서>의 핵심은 마지막이다. 첫날 밤의 실패를 회상하는 예순이 넘은 에드워드는 이렇게 후회한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부족했던 건 고작 ‘다독거림’ 뿐이었다. 뒤늦게 몸의 대화법을 깨달은 자의 한탄이었던 셈이다.


    <칠드런 액트>는 정통 텍스트북은 아니지만, 역시나 고난도 육체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론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여기엔 <체실 비치에서>의 두 주인공보다 더 많이 배우고 사회적 명망도 높은 부부가 등장한다. 남편인 잭은 인류학 교수이지만 섹스 앞에선 에드워드와 비슷하다. 오히려 더 유아적 퇴행을 고상한 언어로 표현하는 위선을 보이는데 이런 식이다. 그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게 언제지?’란 질문과 함께 ‘죽기 전에 한 번은 대단하고 열정적인 연애를 하고 싶다’며 공개 외도를 선언한다. 소설 속 잭의 나이가 대략 50대 후반임을 감안한다면, 육체 커뮤니케이션의 습득은 사실 나이와 무관하다. (철드는 건 나이와 상관없다)


    잭은 고상했지만, 아내 피오나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피오나가 왜 인간의 신체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됐는지, 잭은 모른다. 그럴듯한 수식어로 바람피우는 자신을 정당화할 뿐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고등법원 판사인 피오나가 한 소년의 죽음 소식을 듣고 괴로워할 때, 잭의 머릿속엔 오랜 시간 끊겼던 부부관계의 재개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잭은 고등 교육을 받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문명인이다. 때문에 마치 이언 매큐언은 본성적 지배를 받는 동물 남성이 고도로 진화된 몸의 대화법을 익히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염세적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 들고 배워도 철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가..)


    어쩌면 깨달음은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남성성의 퇴화에 따른 동물적 욕망의 감퇴만이, 육체적 관계를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할 수도 있겠다. 이언 매큐언의 절망적인 전망처럼, 고난도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습득 불가능한 기술일지도. 그러나 이언 매큐언의 텍스트북이 전하는 핵심은 비관적인 결론이 아니다. 하고 말고의 문제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 부부 혹은 연인 관계는 욕구 해소의 합법적 프리패스가 아닌,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서 출발하는 고난도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임을, 설령 깨닫진 못하더라도 일단 암기라도 하고 볼 것. 그게 매큐언 선생이 전하는 성교육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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