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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카토 Jan 19. 2018

마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담배 겉면에 붙어있는 폐암 환자의 모습을 봐서일까. 암에 걸린, 혹은 다른 육체적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쉽게 움직인다. 동정하고 위로한다. 마음의 고통은 다르다. 사람들의 동정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 앞에서 차갑게 식는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를 이성이 대체한다. 공감 대신 판단하고 평가한다. 고통의 실체를 조직 사진처럼 꺼내 보일 수 없으니, 외로울 수밖에 없다. 혹시 그렇다면 자살 직전의 정신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질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한 인간의 내면적 붕괴를 일종의 마음 조직 사진처럼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요조는 출발부터 달랐다. 어려서부터 요조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 삼시 세끼 밥을 먹는 모습도 요조의 눈엔 의아할 따름이다. 이때 생겨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왜 나만 다를까. 남과 다른 내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요조는 자신의 천성적 다름을 감추기 위해 익살을 선택했다. 이해 안 가는 인간의 행동을 흉내 냈다. 하지만 온전한 이해가 빠진 흉내는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동시에 안과 밖에서 압박이 생겨난다. 밖으로는 나의 다름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에 대한 위기감. 안으로는 과연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에 관한 혼란스러움. 그래서 요조는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P.90)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요조의 속성은, 날 때부터 요조의 DNA 어딘가에 입력되어 있었을 거다. 유년기 시절, 유복한 가정환경과 요조의 노력 덕에 유전적 정보는 어느 정도 감춰져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주변 환경이 요조의 유전적 정보를 압박한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겐 사소할 수도 있는 사건(혹은 누적된 사건)이 방아쇠가 되어 유전적 정보가 발현된다. 마음의 고통과 내면의 붕괴가 시작된다. 이 즈음 타인의 판단도 개입된다. 고작 그 정도로 힘들어해서야... 나약한 인간. 요조는 태생부터 이해받지 못했다. 내면의 혼란과 고통 역시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커져갔다. 내면의 세계를 끝장내버릴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탄보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여자들한테서 끝내 한 번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괴상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P.61-62)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빅뱅의 비밀 혹은 생명 탄생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보다 힘든,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P.92)란 요조의 말처럼 가족이나 친구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끊임없이 이해받기를 갈구하고,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는다. 이때 우리의 위로는 어떤 형태가 돼야 할까. 요조의 친구 호리끼와 보호자 넙치는 전형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요조의 상태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신 혼잣말을 하듯, 자신의 믿음을 해결책인양 제시한다. 

    

     가장 서투른 위로 방식. 너의 내면적 고통을 내가 해결해주겠다는 식의 계몽주의적 위로. 보통 연인관계에서 남자들이 자주 드러내는 방식이다. 데카르트식 기계주의의 영향이다. 수리공이 고장 난 차를 고치듯, 문제의 원인을 알면 모든 것은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인생관 혹은 인식론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데 불과하다. 더 엄밀히 말하면 계몽주의적 위로는 마치 시간당 돈을 받는 상담사의 태도로 타인의 문제를 당장 해결하여, 마음 울적해지는 고민 얘기 따위는 집어치우게 만들고 싶은 이기적 욕망의 발현이다. 요조의 친구이자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호리키의 특성이 전형적인 모습이다.    

 

 호리키하고 교제하면서 또 좋았던 점은 호리키가 상대방의 생각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그의 소위 정열이 분출하는 대로 (혹은 정열이란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온종일 시시한 얘기를 계속 지껄여 대서, 둘이서 걷다가 지쳐도 어색한 침묵에 빠지게 될 염려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P.47)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미션 임파서블’이라면 목표 기준을 낮추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내를 갖고 일단 정성스럽게 들어주겠다는 결심. 이해를 못하겠다면 고개라도 정성스럽게 끄덕이겠다는 생각이 고개 끄덕임 위로다. 무성의한 기계적 고개 끄덕임이 계몽주의적 위로보다는 효과적이다. <인간 실격>의 요조가 그나마 위로를 받았던 인간은 대부분 여자인데, 실제로 여자들이 들어주는 위로에 능하다. 요조의 정부였던 시즈코가 요조를 두고 ‘(그는)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니에요. 너무 착한 사람이라, 그래서....’라고 말하는 것처럼, 온전한 이해는 아니더라도 판단 대신 공감을 시도하는 게 효과적이다.    

 

     요조처럼 극단적이진 않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정체불명의 내면적 고통을 경험한다. 고통의 실체가 애매해서 위로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혼자서 감내하자니, 내면적 방황이 마치 암세포처럼 이유 없이 증식한다. 그럴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큰 위로가 된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간접적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사실 인간이 여유가 좀 있어야 타인의 고민을 들어주고 이해하려 노력할 텐데, 각개격파 개별생존의 분위기에서 어떤 위로가 가능할까 싶긴 하다. 삶이란 게 링 위의 격투가 아닌, 야구 같은 팀플레이란 인식을, 그러니까 내가 3할을 못 쳐도, 가끔 실책을 해도 실격이 아니란 기분을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느껴도 괜찮으련만, 요조는 끝까지 그런 느낌을 받아보지 못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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