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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카토 Dec 21. 2017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가끔 운전하다 네비 해독 실패로 길을 헤맬 때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아내는 좀 돌아가는 게 어떠냐며 달래지만, 사실 시간을 허비해서 화나는 게 아니다. 길을 헤매는 과정 그 자체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살이도 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견뎌냈건만, 인생의 모든 순간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 그때의 허무는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를 찾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허무는 인간이 감내하기 가장 힘든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 아무래도 인간은 불멸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에 금전이나 권력 같은 유한한 가치보다는 관계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나를 중심으로 이어진 관계는, 나의 존재와 상관없이 내 삶의 의미를 세상에 남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고 난 후에도 나를 추억하게 될 가족과 친구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된다면, 그래도 내 인생은 정처 없이 방황한 건 아닐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우리가 관계에 집착하는 이유인데, 문제는 관계가 몹시 불안정하단 점이다. 두 개의 독립적 세계가 서로 연결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연결은 언제든 끊어질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대학 입학 후 삶의 전체를 통째로 부정당했던, 그리하여 6개월 동안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죽음만 생각하며 산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다. 다자키 쓰쿠루의 비극은 그가 너무나 풍성한 사춘기 시절을 보낸 데서 시작된다. 다자키 쓰쿠루는 운 좋게도 인생에 색채를 더해줄 (실제로 이름에 다양한 색이 포함되어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과 맺은 관계는 곧 다자키 삶에 색을 칠해준, 삶의 의미이자 전부였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다자키는 이유도 모른 채 4명의 친구들에게 절교를 통보받는다. 죽음만 생각했던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떠밀린 건지, 아니면 제멋대로 떨어져 버린 건지, 그건 잘 몰라. 아무튼 배는 항해를 계속하고 나는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갑판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봐. 배 위에서는 아무도, 승객도 선원도 내가 바다에 빠졌다는 것을 몰라. 주위에는 붙잡을 것도 없어. 그때의 공포를 난 지금도 품고 있어. 자신의 존재가 느닷없이 부정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개쳐지는 공포. 아마 그 때문에 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을 거야.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늘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지.” (P.343)


     30대 중반이 된 다자키는 새로운 연인 사라를 만나고, 그녀와 더 깊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한 때 자신을 죽음까지 내몰았던 절교 선언의 비밀을 찾아 떠난다. 삶을 지탱해주던 관계의 끈이 끊어지는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철없던 시절의 짧고 뜨거운 연애라 할지라도, 견뎌내기 쉽지 않다. 삶의 염세적 측면만 바라보는 냉소적인 인간일지라도 버티기 힘든 고통이다. 이때의 고통은 단순한 상실감이 아니다.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것과는 좀 다른, 관계를 이어오기 위해 쏟았던 시간과 에너지를 부정당한 것 같은 허무감, 나아가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고통의 핵심이다.


     다자키는 결국 4명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절교 이유를 듣게 된다. 사실 그들이 ‘왜’ 절교를 선언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절교를 선언했다는 그 자체가 전부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십 년 만에 듣게 된 절교 사유는 황당한 수준이다. 오히려 절교의 비밀보단, 학창 시절에서 멀어진 친구들의 현재 모습이 더 흥미롭다. 색채가 가득했던, 그리하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인생에 색을 더했던 그들의 삶은 이제 심심한 모노톤이다. 다자키의 순례는 핀란드 남자와 결혼해 그곳에 살고 있는 구로노를 찾아가는 것으로 완성된다. 더 이상 구로라는 애칭을 쓰지 않는 에리와의 만남에서 다자키는 순례의 깨달음을 얻는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P.436-437)


    20대 초반 다자키에게 '관계'는 삶의 의미였고, 관계의 단절은 곧 의미가 사라졌음을 뜻했다. 30대 중반, 다자키는 관계의 '기억'이 삶의 의미며, 기억이 남아있는 한, 인생은 관계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좌우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즉, 과거의 관계는 기억의 박물관 속에 소장되어 있는 한, 완전히 증발하지 않는다. 기억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그건 허무한 게 아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인생이 기억하고 있으면,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게 된다. 결국 우리가 할 고민은 어떻게 자서전 마지막 페이지를 멋있게 장식할 것인가가 아닌, 순간순간을 어떻게 치열하게 경험할까에 달려있다. 


    새 연인 사라에게 고백을 하고 그녀의 답을 기다리던 다자키는 ‘만약 사라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난 정말로 죽어버릴 거야’라고 생각했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모든 관계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다. 실제로 다자키는 20대 초반의 죽음을 생각했던 시절로 되돌아갈지 모르나, 하루키는 마지막까지 사라의 승낙 여부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녀가 뭐라 답을 하건 다자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다자키는 은연중에 30대의 지혜를 얻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던 실존주의자들의 어려운 말을 나는 다자키가 떠난 그 순례를 통해 실감했다. 


인생은 복잡한 악보 같다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16분 음표와 32분 음표, 기묘한 수많은 기호,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올바르게 해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설령 올바르게 해독했다 하더라도, 또한 그것을 올바른 음으로 바꿔 냈다 하더라도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가람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리란 보장도 없다.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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