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겅퀴를 든 자화상, 알브레히트 뒤러
지금은 독일이 경제 대국으로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이 세지만, 역사적으로 게르만족은 야만인이라고 로마인들에게 늘 무시당하던 민족이었습니다. 르네상스가 한창일 때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죠. 피렌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회화 예술이 꽃피고 있었지만, 독일 지역은 여전히 중세 종교 그림 영향권 아래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독일 지역에 위대한 예술가 한 명이 나타납니다.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였죠. 우리에겐 좀 낯선 이 독일 예술가는 사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동시대를 살았던 오래된 화가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다행히 그의 고향 뉘른베르크는 구텐베르크로 시작된, 인쇄 문화의 중심지였고, 이탈리아와 상대적으로 가까웠습니다. 헝가리에서 건너온 유명한 금세공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판화를 포함,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뒤러는 독일 유명 공방에 들어가게 되죠. 그리고 더 많은 경험을 위해 그는 고향을 벗어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엔 뒤러 작품이 딱 하나 있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작품이죠. <엉겅퀴를 든 자화상>입니다. 사실 이 그림은 작아서 쉽게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일단 보면 한눈에 봐도 잘생긴 청년, 뒤러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는 사랑의 정절을 상징하는 엉겅퀴를 손에 들고 있는데요. 이 작품은 뒤러가 프러포즈용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라파엘로의 초상화처럼 우아하진 않지만, 머리에 쓴 모자나 머리카락이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옷감의 디테일이나 엉겅퀴를 든 손의 모습까지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려져 있죠.
머리 위엔 좌우명 같은 글귀도 적혀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My affairs will go as ordained on high”, 내 과업은 하늘에서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니‘ 정도의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약혼녀에게 프러포즈하면서 신부의 얼굴이 아닌, 자신의 초상화를, 그것도 자기애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조된 작품에 좌우명까지 써서 줬다니, 어딘가 좀 어색한 게 사실입니다.
지난봄, 프랑스와 미테랑 도서관에서 ’구텐베르크의 유럽‘이란 주제로 직지가 공개됐는데요. 여기에 뒤러의 판화 작품도 같이 전시됐는데, 작품들을 보니 그의 판화 기술은 이미 최고 경지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뒤러 특유의 디테일이 잘 살아있죠.
이 삽화를 보며 요한묵시록을 읽었을 때, 당시 독자들은 얼마나 무서워했을까요. 여행에서 돌아와 결혼하고, 공방까지 열었던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판화 장인으로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미술의 중심, 축구로 치면 프리미어리그인 이탈리아에 진출하기로 합니다. 그가 태어난 독일에선 그가 꿈꾸는 최고 수준의 미술을 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피렌체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우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어깨너머로 보고 자랐던 라파엘로와 한번 비교해 보면, 뒤러가 르네상스의 예술가로 성장하기에 꽤 황량한 환경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뒤러는 사교육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시골 오지에서 혼자 공부하며 대입을 준비했다고 볼 수 있겠죠.
독일 촌뜨기라고 무시당하면서도, 뒤러가 힘든 길을 걸어갔던 이유의 답이 <엉겅퀴를 든 자화상>에 숨어있습니다. 르네상스 이전, 미술가들은 사회에서 그다지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머리를 쓰는 학자들과 달리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몸을 써서 일한다는 이유에서였죠. 화가는 의뢰인의 주문대로 그려주면 되는, 기술자 정도로 폄하됐습니다. 그런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게 르네상스였죠. 물론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의 3 대장도 의뢰인의 주문을 받았지만, 교황이나 왕처럼 높은 사람이었고, 그마저도 미켈란젤로 같은 화가들은 제멋대로 굴기도 했습니다. 예전과 달리 화가들이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갖기 시작했던 건데, 그런데도 자기 얼굴을 그릴 정도까진 아녔습니다. 당시 초상화의 대상은 아무나 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뒤러는 자기 얼굴을 애정 듬뿍 담아 그린 겁니다. 그게 전부가 아녔습니다. 심지어 서명까지 했습니다. 나아가 좌우명까지 적어놨죠.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도 갖지 못한 거대한 자아의 소유자가 바로 뒤러였던 겁니다.
프티 팔레에서 열린 기획전 ’흑백의 보물들‘입니다. 여기서 뒤러가 오랜 기간 품고 있던 자신의 숙명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아담과 이브>입니다.
뒤러는 피렌체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인체 비율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좋은 스승이 없었기 때문에 답을 찾는 과정은 험난했을 겁니다. 하지만 독학하며 익힌 공부가 대치동 사교육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처럼, 뒤러는 르네상스 작가들에게선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독일식 르네상스 화풍을 <아담과 이브>에 담아냈습니다.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의 작품처럼 자연스럽진 않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엔 정답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르네상스인의 원형이 숨어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함에 도달하기 위한 르네상스인의 치열함이 묻어있는 거죠. 실제 베네치아 유학 시절에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 차별과 멸시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뒤러의 거대한 자아는 어지간한 일로 크게 상처받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렌체 화가들이 누리는 지위를 보며, 독일 예술가의 신세 한탄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의 걱정대로 독일은 아직 뒤러라는 르네상스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처음엔 수준 이하의 의뢰인들과 실랑이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으며, 자신의 사명을 신에게 부여받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계속 그림을 그리며, 독일을 대표하는 르네상스인으로 살아가자, 명성이 서서히 쌓여갔습니다. 결국 막시밀리안 황제의 그림 주문을 받는 수준에 오르게 되죠.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시 그의 <엉겅퀴를 든 자화상>으로 돌아와 봅니다.
이 그림에도 자기애가 묻어있지만, 노년에 자신을 마치 예수처럼 그린 자화상과 비교하면 어딘가 불안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는 르네상스 황무지에서 태어났지만, 제2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꿈꿨던 젊은이였을 겁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꿈의 간극이 어마어마했겠죠. 그 간극 사이로 나오는 불안감은, 자기애가 아무리 강한 뒤러라 할지라도 극복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나이 고작 23세였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 피렌체에 진출해 르네상스 3 대장처럼 되겠다는 자신의 사명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막막했겠습니까. 그래서 아마 뒤러는 이 그림을 그렸을 겁니다. 그림을 그리며, 흔들리는 자신의 불안을 지워내고, 자기 약혼녀에게 자신의 사명을 호기롭게 선언하며 마음을 다잡았겠죠.
<엉겅퀴를 든 자화상>의 엉겅퀴는 아내에게 바치는 정절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예술가적 사명에 보내는 헌사이기도 했을 겁니다. 결국 막시밀리안 황제의 화가가 되고, 황제에게 융숭한 접대를 받으며,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존중받았으니, 23세에 꿨던 뒤러의 꿈은 이뤄진 셈입니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림 밖으로 풍기는 뒤러의 과도한 자기애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야 말로 진정 필요한 건 뒤러의 흔들리지 않던 자기애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쉽게 깨지고 상처받는 자아에게 <엉겅퀴를 든 자화상>에 담긴 뒤러의 강렬한 눈빛과 ’내 과업은 하늘에서 예정대로 진행될 터이니 ‘같은 자아 과잉의 문구가 힐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