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빗헌터 Aug 29. 2020

어이 청년, 트레킹이 뭐가 재밌어?

트레킹 2일차 지누단다 ~ 도반(2,500m)

1일차 마큐 ~ 지누단다(1,740m)

2일차 지누단다 ~ 도반(2,500m)

3일차 도반 ~ 데우랄리(3,200m)

4일차 데우랄리 ~ ABC(4,130m)

(하산) 5일차 ABC ~ 시누와(2,340m)

(하산) 6일차 시누와 ~ 포카라(850m)



트레킹이 뭐가 재밌어?


아직 등산을 좋아할 나이는 아니지 않나? 근처에는 아직 취업 준비를 하는 친구들도 있고, 대학원을 다니거나 이제 막 취업을 해서 수습사원 딱지를 뗀 친구들도 많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2030 세대의 등산 유행보다 먼저 트레킹을 좋아하게 된 나를 내 근처 친구들은 대부분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니 굳이 힘들게 왜 산을 올라가 아저씨도 아니고? 너도 막걸리 마시고 취한 채로 지하철 타고 그러냐?" 이런 질문도 받아봤다.



운동을 한다면 차라리 웨이트 트레이닝을, 취미라면 서핑, 핫한 곳에서 음주가무를 더 좋아할 나이지만 언제부터인가 트레킹에 흥미를 느끼게 된 나를 돌아보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쩌다가 좋아하게 되었을까? 트레킹은 느리고 상대적으로 정적인 운동인 것은 맞다. 내가 트레킹을 좋아하기 된 이유는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성향과 자기가 잘 맞다면, 트레킹 한 번 가보는 것 어떤가?


첫 번째로, 트레킹은 충분한 사색의 시간을 준다. 걷는 중에는 오롯이 걷기만 해야 한다. 휴대폰을 볼 수도 없다. 다른 어떤 수단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풍경은 느리게 바뀐다. 그래서 빠르고 격렬한 운동보다 오감을 자극할만한 환경 변화가 크지 않으며 그만큼 사색의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바쁜 일상과 휴대폰 알람으로부터 벗어나 조용한 생각의 시간을 갖고 싶다면 트레킹은 좋은 수단이 된다.


두 번째로, 트레킹은 자연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두 다리로 땅을 내딛고, 두 팔로 나무와 돌을 잡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서,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숲을 감상하는 것만큼 온전히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자동차로 갔던 길을 자전거로 다시 간다면,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다시 한번 그 길을 걸어간다면 앞서 두 번이나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걸어야 온전히 보이는 법이다.


하루에 열 번도 더 만나는 동물들


세 번째로, 정상 혹은 전망대처럼 목표로 하는 지점에 도착하여 성취감과 그곳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즐기기 위한 방법도 역시 트레킹이다. 4일 동안 걸어 올라간 최종 목적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포카라에서 헬기를 타고 1시간 만에 올 수 있다. 다시 말해, 충분한 돈만 있다면 해발 900m의 포카라에서 당일치기로 해발 4,130m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와 8,000m급 봉우리들의 만년설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헬기를 타고 와서 보는 풍경과 내 발로 4일 동안 걸어 올라와서 보는 풍경에 대한 감흥은 차원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하루 걸을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자연,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떨어지는 산소의 농도, 거짓말처럼 달라지는 아침과 밤공기, 지나치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은 오직 트레킹으로서만 느낄 수 있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느끼는 성취감과 그곳에서 누릴 수 있는 미친 듯이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의 정도는 내가 그곳까지 걸어오면서 힘들었던 시간들과 정확히 비례한다.


끝없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트레킹 2일 차, 오늘은 지누단다에서 도반(2,500m)까지 가는 날이다. 지누단다까지는 술을 마셔도 괜찮다고 하여, 어제저녁을 먹으면서 맥주 한 캔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괜히 마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으로 잠을 설친 기분이었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앞으로 하산 1일 차 저녁까지, 만 4일 동안은 술을 못 마신다. 여행을 오면 건축물이든 자연이든 무언가로 눈 호강을 하면서 항상 술을 마시며 저녁을 행복하게 보냈던 기억이 나서 조금 아쉬웠지만, 고산병 대비와 컨디션 유지를 앞으로 위해 마시지 않기로 했다.


끝없는 오르막길


지누단다에서 도반까지의 길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끝없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다. 출발지와 도착지의 해발고도차는 약 750m 정도로 무난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평지가 거의 없는 코스였고 올라간 만큼 내려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10월이었지만, 네팔은 한국보다 더 적도에 더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한국과 동남아시아 사이 어딘가의 날씨처럼 굉장히 습하고 더웠다. 우리는 학군사관후보생 시절, 하계훈련에서 군장을 매고 교장으로 이동하던 후보생들처럼, 연신 땀을 닦고 물을 마시며 체력을 보충했다. 짧게나마 숨을 둘릴 수 있었던 길고 긴 내리막길은, 3일 뒤 고통스러운 오르막길이 되리라는 생각은 우선 접어두기로 하였다.


끝없는 내리막길


새하얀 병풍 같은 신들의 세계 속에 파묻힐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이름 모를 여러 개의 마을을 오르내리다 보면, 전망이 아주 좋은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초록색 산의 계곡들 사이 저 너머로 만년설이 쌓여있는 백색의 안나푸르나 봉우리들과 마차푸차레 정상을 감상할 수 있다. 초록의 산들은 현실적인 풍경이었지만, 그 뒤의 만년설들은 마치 인간 세계를 지켜보는 백색의 신들처럼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원 없이 내뿜었다. 모레쯤이면 저 새하얀 병풍 같은 신들의 세계 속에 내가 파묻혀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커피와 초콜릿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했다. 나는 미리 챙겨 온 킨들을 꺼냈다. 이렇게 시간이 날 때 읽기 위해, 정유정 작가가 쓴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담아왔다. ABC 트레킹보다 조금 더 길고 힘든 '안나푸르나 서킷'을 다녀온 프로 작가가 쓴 책이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의 뛰어난 문장과 표현을 보면, 나의 트레킹 여행 또한 더 풍성해지는 느낌이라 틈날 때마다 감상평을 위주로 많이 읽었다. 


전자책과 함께라면, 원하는 곳 어디든 당신의 도서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


인도에서 만난 지인을 네팔에서 다시 만나다


짧지만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동행 한별이는 지금쯤 이 트레킹 코스에서 지인 한 명을 마주칠 예정이었다. 이 친구는 몇 달 전, 인도 법인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는데, (나와 한별이는 같은 대학교를 나왔고, 직무는 다르지만 운 좋게 같은 회사에 입사해 근무를 하고 있다.) 그곳에서 법인 소속의 한국인 과장님과 친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분도 우리와 비슷한 일정으로 ABC 트레킹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제부터 휴대폰이 잘 터지지 않아 서로의 실시간 위치를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쯤이면 그 과장님은 하산하시는 길일 테고 오늘 중에는 여기를 지나쳐가실 텐데..."라고 중얼거리면서 한별이는 연신 마주 보고 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 머지않아, 우리가 점심을 먹기로 한 시누와에 도착하기 전에 그 과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런저런 근황을 묻고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다시 걸었다. 네팔 히말라야 산맥 속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이 곳에서 아는 사람들 만나게 되다니 참 신기했다.


우연히 만난 선배님과의 사진 한 컷


그렇게 한별이의 출장 이야기를 들으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시누와에 도착했다. 나는 이 시누와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였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제외하고, 머물렀던 마을 중 가장 좋았다. 맑은 날씨, 평화로운 분위기와 해맑은 아이들, 그 아이들의 노랫소리, 하산할 때 저녁 만찬과 디펜드라, 비스누와의 광란의 댄스파티 등 여러 추억이 많은 마을이었다. 


시누와는 오늘 지나쳤던 마을 중 손꼽힐 정도로 컸다. 내가 쉬었던 롯지 'Sherpa Guest House'는 닭죽과 김치찌개 등 한식을 제공했고 사장님의 딸로 보이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다. 거부감 없이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는 게 신기했고 아이들이 정말 순수하고 행복해 보였다. 세상의 불행으로부터 도망친, 산속에 숨어 온전한 행복을 누리는 마을이 있다면 시누와였으리라... 물론 운 좋게 날씨가 좋은 덕도 있었겠지만, 평화롭고 조용하던 시누와에서의 휴식은 수 없이 오르막길을 걸으며 지쳤던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가기에 충분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지금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수염 주의)


이 곳에 더 있고 싶어 아쉬웠다. 시누와는 우리가 하산하는 날 묵을 곳이라는 말을 들으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 도반까지 저녁에 도착하려면 대나무가 많은 마을 '밤부'를 지나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디펜드라는 출발 전 날씨를 보더니 오늘 오후에는 비가 올 것 같다고 했다. 여차하면 오늘은 우의를 입고 우중 산행을 할 수도 있겠다.


출발한 지 30분 정도 되었을까... 시누와 까지는 없었는데 웬 개 한 마리가 우리를 계속 따라온다. 아마 시누와부터 따라온 것 같다. '우리는 줄게 없는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강아지는 밤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따라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 일행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마을에 있는 개들은 이렇게 트레커들을 따라다니면서 알아서 산책도 하고, 종종 먹을 것을 받아가며 생활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우리는 네게 줄 음식이 없단다


머지않아 디펜드라가 말했던 대로 밤부 즈음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는 자외선이 너무 강해 반팔을 입은 채 선크림을 바르기에 바빴는데, 산속에서는 하루 만에 안개와 화창한 날씨, 폭우까지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네팔 트레킹을 10월경 간다면 한여름부터 한겨울 복장까지 한 세트씩은 모두 준비하길 바란다. 


한국과 너무 비슷하잖아... 괜히 왔나?

   

오늘까지도 산의 풍경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틀 내내 한국과 너무 비슷하잖아... 운동하는 건 좋지만, 소중한 휴가와 여행 경비를 생각한다면 솔직히 조금 아까운데... 나 왜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지?"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2일 차 오후를 걷던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내일부터 물론 더 환상적인 경치를 볼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비를 맞으며 어디인지도 모르는 산속을 걷고 있으니 부끄럽지만 약간의 회의감이 몰려왔다. 지나고 생각하면 그런 감정들이 더욱 마지막에 드라마틱한 성취감을 선사해주는 것은 맞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네팔 트레킹 여행은 최고의 선택이었고, 나는 꼭 다시 갈 것이다. 한 번 가보시라. 괜히 왔다는 생각은 ABC로 출발하는 날에 싹 사라 질 것이다.


안개가 자욱한 밤부 근처


오늘의 목적지인 도반에 다 와가니 비는 어느 정도 그쳤다. 하지만 안개가 구름처럼 잔뜩 끼어있어 풍경을 전혀 즐길 수 없어 다소 지루한 산행이었다. 내일부터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해발 3,000m 이상의 느낌은 어떨지, 고산병 위험은 없을지, 트레킹이 끝나고 포카라에서는 뭘 하면서 놀지를 생각하면서 걸었다.


직장인 일상으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이 필요하다


회사 생각은 안 하려고 노력했다. 하루 이틀 정도 쓰는 휴가는 주 5일 출근의 관성으로, 메일도 들여다보게 되고 혹시 내가 휴가일 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나 휴가 중간에 메신저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일주일 이상 긴 휴가를 떠나면 회사에서도 날 찾지 않고 나도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의 여행에 집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직장인 일상으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을 통해 생각을 환기 시켜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회사든 회사 사람이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긴 휴가를 통해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회사를 지우고' 나를 돌아보고 정의해보자.


이전 05화 네팔 트레킹, 설렘과 두려움 사이 그 어딘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