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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빗헌터 Aug 30. 2020

앞으로 씻는 것은 사치야

트레킹 2일차 지누단다 ~ 도반(2,500m)

1일차 마큐 ~ 지누단다(1,740m)

2일차 지누단다 ~ 도반(2,500m)

3일차 도반 ~ 데우랄리(3,200m)

4일차 데우랄리 ~ ABC(4,130m)

(하산) 5일차 ABC ~ 시누와(2,340m)

(하산) 6일차 시누와 ~ 포카라(850m)



ABC 트레킹 중 씻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ABC 트레킹 코스에 있는 롯지들은 대부분 샤워 시설을 제공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도반(해발 2,500m) 이후로는 샤워를 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반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데우랄리의 롯지에서도 물론 물은 나오기 때문에 샤워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샤워는 어렵다. 일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도반 이후로 48시간 ~ 72시간 정도는 씻지 못하는 상태로 걷고, 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우중충한 날씨의 도반. 우측 하단 파란색 문들이 샤워장 및 화장실이다


첫 번째 이유로 샤워시설과 여건이 그리 쾌적하지 않다. 화장실 변기 바로 옆에 샤워기가 설치되어있는 곳이 대부분이고 별도 탈의실이 없다. 드라이기 등 편의용품도 당연히 전무하다. 그리고 녹초가 되어 들어온 롯지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땀이 금방 식는다. 불편한 샤워시설과 더불어 밥을 먹고 오면 금방 졸리기 때문에, 또 내일 새벽부터 시작할 일정을 생각하면 얼굴만 대충 씻고 잠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고산병의 위험이다. 롯지에 머무르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은 낮에 비해 기온이 굉장히 많이 떨어진다. 방 안에도 난방 시설이 없기 때문에, 롯지에서 샤워를 하면 몸과 머리에 묻은 물기로 인해 체온이 내려가게 되고 컨디션 조절 실패 및 고산병 증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한 번 찾아온 고산병 증세는 최소 반나절, 길게는 하산할 때까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의 찝찝함은 감수하는 것을 추천한다. 최종 목적지인 ABC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그 장관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탈없이 트레킹을 잘하다가 마지막 날 아파버리면, 일생에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장관 앞에서 '경치는 모르겠고 빨리 내려가고 싶다.'라는 생각만 들 수 있다.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도반은 나에게 세신의 땅이었다.


나는 도반까지 오는데 체력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오후 내내 비를 맞아서 너무 찝찝했다. 가이드 디펜드라는 "네가 원하면 여기서는 씻어도 괜찮다. 하지만 내일 데우랄리에서 샤워는 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고 하여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도반에서 온수 샤워를 했다. 오전 내내 땀으로 샤워를 하고 땀이 채 식기도 전에 오후 내내 비를 맞으면서 걸어왔기에, 개운함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공용 샤워장은 끽끽 대는 철문 하나로 바깥의 매서운 비바람을 가까스로 막아주고 있었다. 샤워장 밖에는 몸을 닦고 옷을 입을 실내 공간이 없었다. 습기가 가득한 샤워장에서 그대로 최대한 몸을 닦고, 옷을 다 입은 후에 재빠르게 야외 복도를 지나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다시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몸을 더 닦고 체온을 최대한 뺏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행히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여러분들도 도반까지 걸어올 때 체력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면 가이드와 상의 후 도반에서는 씻는 것을 추천한다. 여기서 씻지 못하면, 샤워시설이 더 열약한 데우랄리에서는 고산병 위험도 더 커지기 때문에 샤워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 저녁 도반에서 씻고, 나는 하산 1일 차 저녁(시누와)까지 72시간 정도 샤워를 못했다. 중간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하산 1일 차 점심을 도반에서 먹을 때 나는 이 곳 세면대에서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감았다.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도반은 나에게 세신의 땅이었다.


왼쪽부터 한별, 가이드 디펜드라, 포터 비스누, 그리고 나


트레커들이 먼저 저녁을 먹고, 현지 가이드와 포터는 뒤늦게 저녁을 먹는다.


롯지에 도착한 저녁 시간은 보통 이렇게 주방에서 함께 보냈다. 통상 트레커들이 먼저 저녁을 먹고, 현지 가이드와 포터는 뒤늦게 저녁을 먹는다. 밀려드는 트레커에 비해 주방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트레커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다음, 현지인들에게 저녁을 주는 것이 이 곳 롯지의 문화라고 한다. 우리와 똑같이 고생하고 배도 고플 텐데, 디펜드라와 비스누는 보통 우리보다 1~2시간 정도 늦게 저녁을 먹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한국에서 가져온 캔 요리를 나눠주는 것 외에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포터 비스누가 깎아준 과일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스누는 식사를 마친 우리에게 직접 과일을 준비해줬다. 우리의 짐을 들어준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 과일까지 준비해줘서 정말 감동이었다. 투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선보인, 꽃다발 같은 데코레이션은 정말 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구입한 여행사 상품에 '제철 과일 제공'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귀국 후 이렇게 글을 적으면서 알게 되었다. 트레킹 당시에 알았더라도 저런 정성스러운 과일 플레이팅은 '핵감동' 이었을 것 같다.


우리가 알려준 오목을 두는 비스누와 디펜드라

우리는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까지 미리 가져온 책이나, 롯지에서 제공되는 영어 원서를 깔짝대다가, 가이드 디펜드라와 함께 내일 걸어갈 트레킹 코스를 지도로 확인하곤 했다. 디펜드라는 내일의 날씨와 입어야 할 복장을 알려줬고, 매일 우리의 몸 상태도 진지하게 확인했다. 시간이 남으면 이렇게 오목도 두고 장난도 치면서 더 친해졌던 것 같다. 다재다능한 디펜드라는 이번 트레킹 때 처음 알게 된 오목을 며칠 두더니 결국 이틀 뒤에 나와 한별이를 이겨버렸다. 똑똑한 사람... 저 두 사람 덕분에 우리의 네팔 트레킹 여행은 정말 완벽했던 것 같다. 도반에서의 저녁도 이렇게 어두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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