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독일 여행길 하면 독일 중부의 뷔르츠부르크에서 퓌센까지 470km에 이르는 독일낭만가도 (Romantische Straße)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라인계곡을 따라 독일 서부의 쾰른에서 출발하여 마인츠까지 라인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매우 아름다운 전설로 가득한 라인 낭만길 (Route der Rheinromantik)도 있다.
또한 독일 남부의 린다우에서 베르히테스가덴까지 이어지는 450km에 걸쳐 온통 눈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끽할 수 있는 독일알프스길 (Deutsche Alpenstraße)은 노이슈반슈타인성과 호헨슈방가우성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슈바이겐-레흐텐바흐에 있는 ‘독일 포도의 문’(Deutsches Weintor)에서 출발하여 북쪽을 향해 85km에 이르는 독일 남부 지역의 이른바 독일포도농장길 (Deutsche Weinstrasse)도 그림 같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림 형제의 삶과 이야기를 따라가는 600km에 이르는 독일동화길 (Deutsche Märchen Strasse)도 있다. 이 길은 독일 문화의 정수를 동화를 통하여 맛보는데 그만이다. 그림 형제 특유의 약간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들이 이어지지만, 호러물이 저잣거리의 장르로 자리 잡은 21세기의 문화에서도 여전히 통하는 그림동화를 현장에서 맛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독일은 낭만과 현대가 공존하는 특이한 나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대륙의 경제와 정치를 주도해온 나라이기도하다. 특히 유럽연합 수립 이후 세계 정치 무대에서 유럽 대륙을 대표하는 나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 단일 언어로 최대의 영역을 포함하는 나라이기도하다. 독일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과학만이 아니라 신학, 철학, 문학은 물론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도 여전히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 깊이 있는 내용을 다 음미하려면 긴 호흡으로 다가가야 하는 나라이다.
흔히 하는 식으로 버스를 타고 보름 정도 돌아다니는 단체 여행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깊이가 있다. 그럼에도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부족한 가운데 독일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을 여행을 할 경우 흔히 여러 나라의 주요 관광지만을 ‘찍고’ 다닐 수밖에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래서 막상 다녀온 곳임에도 나중에 사진만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책에서는 앞으로 가보고 싶은 곳에 대한 사전 정보 제공은 물론 이미 다녀온 곳이라고 해도 그곳에 대한 문화적 해설을 더한 내용으로 추억을 보완하는 것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언택트’ 시대이지만 언젠가는 풀릴 유럽 여행의 자유를 대비하는 의미에서 독자들이 책을 읽어보면서 상상만으로도 독일의 아름다운 곳을 다녀온 느낌을 받기를 바라며 써보았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모든 길을 다니려면 매우 긴 글이 되기에 일단 그 가운데 독일낭만가도, 독일알프스길, 독일라인낭만길을 정리하여 먼저 소개해 본다. 독일포도농장길과 독일동화길은 제2권으로 정리하여 다음 기회에서 다룰 것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독일가로수길은 수천 킬로미터로 이어지며 수많은 작은 동네들을 만나는 길이기에 또 제3권의 별책으로 다루어야 만한다. 어쩌면 이 가로수길을 통하여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로 가면서 독일의 속살을 알아보는 것은 독일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최고의 길이 될 것이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독일 문화여행의 삼부작을 기획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일단 그 첫걸음으로 앞에서 말한 세 길을 먼저 가본다.
참고로 이 책은 독일에 가서 단체 여행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차를 빌려 혼자 하되 정 안되면 맘에 아주 맞는 이와둘이 다니는 것을 전제로 썼다. 그래서 여기에서 소개된 도시보다는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길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는 것을 예상하고 쓴 것이다.
독일의 길은 아우토반으로 유명하지만 뜻밖에 잘 정비된 국도들을 달리는 느낌이 독일의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는 데 더 안성맞춤이다. 한 도시에 1~2일 정도 머물며 충분히 즐기고 나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도시 가운데에만 머무르며 하는 관광 못지않게 크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코로나로 마음의 여유가 더 없어진 시절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보면 이전처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때가 온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듯이 인류는 시련이 있고 나면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해 왔다.
중세의 흑사병과 ‘30년전쟁’이 유럽을 초토화했지만, 그리고 최근에는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이 인류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오히려 그 이후 물질적 풍요를 더 이룬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이제 그 물질적 풍요에 이어 정신적 풍요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 여정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또한 바란다.
사족을 하나 더 달아야겠다. 왜 하필 독일인가? 무엇보다도 필자가 10년 넘게 산 나라이기에 그 어느 다른 나라에 비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는 독일에서 솔로로 있었기에 혼자 하는 여행에 매우 익숙하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단체로 다니는 여행도 매력이 있지만, 그런 경험을 한 다음 늘 느끼는 것이 번아웃이었다. 오죽하면 친한 사람과는 여행하지 말라는 충고도 있을까? 적지 않은 경우 여행한 다음 사이가 오히려 안 좋아지기도 한다. 인간은 어차피 혼자다. 그리고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혼자 이 세상에 와서 혼자 떠난다. 누구도 날 대신해서 떠나 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은 자신이 매우 익숙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떠나보지 않으면 잘 느낄 수가 없다.
사실 모든 인간은 지구라는 별에 잠시 다녀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80억 명의 인구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고민과 자기 나름대로의 슬픔으로 살아가고 있다. 기왕 태어났으니 행복하게만 살고 싶지만 운명의 신은 그런 호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기 최면, 심한 경우 리플리 증후군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자기기만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뛰어난 것이 바로 홀로 여행을 떠나 전혀 낯선 거리에 홀로 서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느끼게 된다. 나는 혼자다. 그런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은 해외여행을 그것도 단독으로 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고독 안에서 한국에서 사는 동안 알지 못했던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외국인들은 내가 한국에서 어떤 학력을 가졌고, 어떤 지위에 있고, 소득이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큰 집에 사는지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만 본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한국에서 나 스스로 플렉스 하기 위해 그리고 남이 나를 재보기 위해 덧쒸운 가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나 자신, 더 나아가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이 홀로 해외여행을, 특히 철학과 예술의 나라인 독일에서 여행을 하면서 얻는 큰 소득이다.
한국인 가운데 독일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물론 이제는 독일의 웬만한 도시에서 영어가 안 통하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조금만 시골로 가면 역시 독일어가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최근에 번역기가 워낙 발달되어 기계의 도움으로 일상적인 대화는 훌륭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속 깊은 이야기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차피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런 속 깊은 이야기를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잘할 수 없다. 다만 그런 척을 할 뿐이다. 그래서 그런 감추어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반드시 매우 낯선 거리에 서보아야 한다. 더구나 말까지 잘 안 통하는 곳에서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맛보면서 홀로 그 낯섦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의 삶 자체에 대한 성찰에 이르기 쉽다. 바로 그런 나그네의 여정에서 느끼는 깨달음이 있게 된다면 다시 돌아온 나의 익숙한 삶의 자리가 낯설게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또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자각이 들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여행에서 값진 소득이 있었다는 징표가 된다.
어느 정도의 세월을 살아보고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은 인생 별 것 없다는 것이다. 내가 추구한 꿈, 계획, 노력 그리고 쾌락과 성취. 다 별 것 아니다. 이제 사회에 들어서서 한창 성취동기가 넘치는 MZ 세대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는 법이다. 필자 자신도 MZ 세대 나이 때는 인생 별 것 없다는 말을 하는 '어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른'의 나이에 들어서 보니 인생 별 것 없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자가 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생 별 것 없기에 오히려 그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강조하듯이 그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된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 인생에 후회가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내가 주체가 되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 여행을 떠나보아야 한다. 그것도 혼자서 낯선 나라에서 하는 여행 말이다. 그러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면 삶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그리고 조금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일단 해보자. Attemp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