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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26. 2020

제국 수상 비스마르크의 숨결이 어린 대학도시 괴팅엔

독일 10대 명문 대학도시 시리즈


인구 12만 명이 채 안 되는 도시에 있는 괴팅엔대학교(Georg-August-Universität Göttingen)의 학생 수는 30,000명이 넘고 교직원도 13,000명 정도 된다. 인구의 20%가 학생이니 당연히 전형적인 대학도시로 불린다. 1734년 괴팅엔대학교를 세운 게오르크 2세 왕(Georg II. August, 1683-1760)은 1727년부터 죽을 때까지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이면서 동시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Braunschweig-Lüneburg)의 선제후로 두 나라를 통치한 독특한 인물이다. 괴팅엔대학교가 개교한 것은 정확히는 1737년이니 280년 정도 되어 니더작센 주(Niedersachsen)에서는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다. 니더작센 주의 또 다른 대학교인 1879년에 세워진 하노버대학교(Leibniz Universität Hannover)와 규모와 역사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명성은 하노버보다 훨씬 높다.     


라이네강(Leine) 연안의 도시인 괴팅엔은 953년부터 거주 기록이 나오지만 1230년 도시권(Stadtrecht)을 확보하여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괴팅엔의 지명은 953년 오토 1세 왕(Otto I)의 문서에 나온 구팅기(Gutingi)에서 기원한다. 이 마을 한가운데로 작은 개천이 흘렀는데 그 이름이 고테(Gote)였다. 독일어 접미사 ‘잉’(ing)은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붙어 오늘날의 괴팅엔이 된 것으로 추론된다. 그런데 이 지역은 현재 루터교 소속의 상트알바니교회( St. Albani Kirche)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괴팅엔에서 가장 오래된 이 교회는 원래 11세기 초에 알바니 성인에게 봉헌된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로 넘어갔다. 독일 여러 지역에서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그래서 건물은 가톨릭 양식인데 주인은 개신교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마을은 시 외곽에 위치해 있어 정작 괴팅엔시와는 지리적으로 직접 관련은 없다. 중세에 괴팅엔은 제국 도시가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Braunschweig-Lüneburg)에 속한 도시로 남아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성을 구축하는 데에 1362년부터 시작하여 무려 400년이나 걸렸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돈이었다. 


괴팅엔 시내 전경


14-15세기에 괴팅엔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 그 증거를 이 당시에 지어진 건물들, 특히 성당 건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괴팅엔도 종교개혁과 30년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공업자 길드가 시정부와 세금 문제로 충돌하면서 경제적 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괴팅엔까지 불지는 않았다, 그러나 1529년 이 도시에 새로 정착한 직물공업자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이 지역의 중요한 종교행사인 바톨로메우스 행렬을 방해하면서 종교적 갈등이 폭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괴팅엔에서도 1529년 10월 24일 개신교 예배가 처음 거행되었다. 종교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1531년 5월 31일 슈말칼덴에서 개신교의 세력 규합을 위한 슈말칼덴연맹이 맺어진다. 그러나 슈말칼덴 전쟁(1546-1547)에서 패한 개신교 세력이 궁지에 몰리다가 결국 1580년 종교적 타협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가 1618년부터 시작된 30년전쟁의 와중에서 1626년 결국 틸리(Tilly)에게 패배한 괴팅엔이 가톨릭 세력의 지배에 놓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과도한 전쟁배상금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괴팅엔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1631년 빌헬름 폰 바이마르(Wilhelm von Weimar, 1598-1662)가 이끄는 개신교 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괴팅엔은 다시 개신교 도시가 된다. 그러나 시민들에게는 누가 세력을 잡든지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었다. 1648년 30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괴팅엔은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의 다툼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1400년경에 6,000명이던 주민이 1680년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길드 조합은 와해되고 영주들이 세력을 강화하였다.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7년전쟁 기간인 1757년부터 1762년까지 괴팅엔은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 이후 괴팅엔은 도시 방어를 위해 쌓은 성벽을 무너뜨려버렸다. 어차피 방어를 할 수 없는 도시를 방어하느니 개방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대학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괴팅엔 시내 거리


1803년 나폴레옹 군대가 쳐들어오자 괴팅엔은 순순히 항복을 했다. 이후에도 많은 정치적 변화가 있었으나 괴팅엔은 무저항주의로 일관하여 난관을 극복해갔다. 그러는 가운데 대학교는 계속 발전해 갔다. 1807년 위대한 수학자인 가우쓰(Carl Friedrich Gauß, 1777-1855)가 괴팅엔대학교 천문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역사적 격동이 독일 지역에 계속되었으나 괴팅엔은 무사히 난국을 헤쳐 나갔다. 그러다가 독일 역사의 전설적인 인물인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65-1890)가 1832년부터 1년간 괴팅엔대학교 학생으로 공부하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비스마르크의 어머니도 상당히 교육에 몰두하는 이른바 ‘헬리콥터맘’에 속하는 인물이라 아들을 외교관으로 키우기 위하여 여러 대학을 고민하다가 괴팅엔을 선택하였다. 이 당시 괴팅엔대학교는 귀족들이 주로 모여 공부하는 매우 유명한 엘리트대학교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다음 해에 베를린으로 학교를 옮겼다. 외교의 중심은 베를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팅엔에 머무는 동안 그는 외교에 필요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미국 친구들을 사귀며 영어 실력도 갈고닦았다. 그리고 이때 사귄 샤르라흐(Gustav Scharlach)와 케른(Fritz Kern)을 비롯한 많은 동료와 평생 우정을 나누었다.    


비스마르크 동상

  

독일의 다른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괴팅엔시는 이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곳곳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을 세웠다. 이후 괴팅엔에는 프러시아에 동조하는 세력이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정치와 무관하게 괴팅엔대학교는 특히 자연과학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계속 유지해 나가게 된다. 프러시아 왕국과 독일제국에 이어 제3제국이 들어서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괴팅엔은 늘 ‘애국적’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의 광풍이 잦아들고 난 다음인 1957년 폰 바이체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1912-2007)를 필두로 한 18명의 독일 물리학자들은 이른바 괴팅엔 선언을 한다. 다시는 핵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부터 괴팅엔에는 도시 재개발의 바람이 불게 된다. 그래서 많은 오래된 건물들이 부서지고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부구하고 이 도시계획은 잘 진행되어 도시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대학교 건물들도 새로 지어졌다. 9백만여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괴팅엔 도서관도 이때에 확장되었다. 1970년대만 해도 학생수가 2만 명대에 머물렀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늘어 1986년 3만 명을 넘긴 이후 계속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1734년 147명의 학생으로 고전적인 학부인 철학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로 시작한 괴팅엔대학교가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이다. 베를린대학교를 세운 훔볼트도 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가 유명해진 것은 리히텐베르크(Georg Christoph Lichtenberg, 1742-1799)와 같은 기라성 같은 자연과학자들 덕분이다. 그리고 게오르크 2세 왕(Georg II)을 비롯한 많은 귀족들의 방문은 이 대학교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그리고 할러(Albrecht von Haller, 1749-1708)는 괴팅엔에 독일 최초의 산부인과 병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화로 유명한 그림 형제의 한 사람인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 1786-1859)이 이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의 형인 야콥 그림(Jacob Grimm, 1785-1863)도 이 대학교 교수였는데 이들은 유명한 괴팅엔 7인(Göttinger Sieben)에 속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였다. 이러한 권력에 대한 저항 정신은 괴팅엔대학교의 전통에 속하고 있다.  

   

괴ㅣ팅엔 대학교 건물


괴팅엔시 자체도 유구한 역사 덕분에 볼만한 것들이 많다. 오래된 건물과 더불어 박물관과 미술관이 즐비하다. 그리고 대학교에 속하는 3개의 식물원인 구식물원(Alter Botanischer Garten), 신식물원(Neuer Botanischer Garten), 숲식물원(Forstbotanischer Garten)도 유명하다. 기념물도 셀 수 없이 많다. 유명한 교회도 많다. 그 가운데 구도심에 있는 상트 야코비 성당(St. Jacobi)은 1402년에 세워진 것으로 그 높이 72m에 이르러 괴팅엔에서 가장 커다란 높이를 자랑한다. 그리고 이 성당 탑에는 14개의 종이 있는데 토요일 11시 30분마다 울린다. 그러니 그 소리를 듣고 싶으면 시간을 맞추어 찾아가야 한다. 구시청사도 유명한 건물이니 볼만하다. 그리고 학생들이 넘치는 도시이기에 괴팅엔에서는 음악 콘서트를 비롯하여 여러 공연이 자주 열린다. 그리고 밤이 되면 시내에 술집에서는 젊은이들이 모여 음악을 즐기며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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