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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25. 2020

영원한 제국의 도시 베를린에서 공부하기

독일 10대 명문 대학도시 시리즈

 

인구 380만의 베를린은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연합의 최대 도시이다. 베를린을 둘러싼 브란덴부르크 주의 주도인 포츠담과 연계한 지역을 합치면 600만 명이 여기에 살고 있다. 그리고 베를린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독일연방공화국의 당당한 주정부이기도 하다. 그만큼 베를린은 독일의 현재와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 연방의회 건물

  

문서상으로 베를린은 1237년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후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 프러시아,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동서독이 분단되던 시절에도 구서독은 본에 임시 수도를 두었지만 통일을 대비하여 베를린을 암묵적인 수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통일되자마자 바로 베를린을 수도로 정하고 수도 이전을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베를린이라는 명칭은 원래 늪지를 의미하는 슬라브어 berlo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 독일어로 접미사 in이 붙어 도시 이름이 되었다. 흔히 말하는 베를린의 상징 동물인 곰(Bär)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명칭이다. 곰이 베를린의 상징 동물이 된 것은 도시의 이름과 유사해서일 뿐이다.     


13세기부터 함부르크와 한자동맹을 맺었다가 1518년 이 동맹에서 탈퇴한다. 그리고 종교개혁 때에도 별 탈 없이 넘어갔으나 30년 전쟁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주택의 3분의 1이 파괴되고 주민의 절반이 죽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였던 빌헬름(Friedrich Wilhelm, 1620-1688)은 종교와 인종의 차별을 두지 않는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취한다. 그래서 유대인과 프랑스의 칼뱅주의자였던 위그노족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뵘, 폴란드, 잘츠부르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으로 이주해 온다.     



그런데 베를린은 프러시아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그 역사의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1657-1713)가 프러시아 왕국의 왕이 되면서 베를린을 수도로 정하게 된다. 이때 지은 베를린 성(Berliner Schloss)은 프러시아 왕국의 왕과 독일 제국의 황제의 궁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베를린도 1806년 프랑스 군에 점령당하고 만다. 이후 1808년 슈타인 남작(Freiherr vom und zum Stein)의 주도로 베를린의 일대 개혁이 이루어진다. 특히 교육 개혁은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1767-1835)가 주도하게 된다. 원래 1810년에 베를린대학교(Universität zu Berlin)로 시작하였다가 1826년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로 개명하였으나 1949년 구동독이 그를 기려 다시 개명하였고 이를 유지하여 오늘날의 베를린대학교(Humbold Universität zu Berlin)의 정식 명칭이 되었다. 현재 베를린에는 4개의 대학교가 있고 모두 베를린대학교로 불린다. 그래서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 자유베를린대학교(Freie Universität Berlin)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인 1948년에 원래 베를린대학교가 동독지역으로 넘어가자 서베를린 지역에서 대응 차원에서 새로 개교된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그리고 1770년에 설립된 학교를 바탕으로 우여곡절 끝에 1946년 다시 문을 연 베를린공과대학교(Technische Universität Berlin)와 1696년에 설립된 학교를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에 이른 베를린예술대학교(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유서 깊고 유명한 것은 당연히 훔볼트대학교이다. 여기에서는 이 대학을 편의상 베를린대학교로 부르겠다. 법학부, 수학 자연과학부, 생명과학부, 의학부, 철학부 I, 철학부 II, 인문사회학부, 신학부, 경제경영학부 등 9개 학부가 있는 베를린대학교는 33,000명의 학생과 4,000여 명의 교직원이 있는 커다란 대학이며 노벨상 수상자도 29에 이른다. 이 가운데에는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과 플랑크(Max Plank, 1858-1947), 코흐(Robert Koch, 1843-1910)와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베를린 시내 전


뮌헨대학교와 마찬가지로 대도시에 있는 이유로 그 존재감은 크지 않아 베를린이 대학도시로 불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재 베를린이 차지하는 독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위치에 맞갖게 베를린대학교도 비중이 큰 대접을 받고 있다.     

 

베를린 자체가 중세 후기부터 근세와 현대에 이르는 독일 역사의 중심에 있었기에 이곳에서 독일의 근대사를 몸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 통치령(1417–1701), 프러시아 왕국(1701–1918), 독일 제국(1871–1918),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제3제국(1933–1945)에 이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로 남아있다. 그 역사적 영고성쇠의 흔적이 베를린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한때 브란덴부르크 주의 수도였기에 시내 중심에 브란덴부르크토어(Brandenburg Tor)가 서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오랜 개방 정책 덕분에 외국인 비율이 20%에 이른다. 그리고 이주민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35%에 이른다. 당연히 외국인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갖추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재 집권 여당이 독일사회민주당(SPD), 좌파당(Die Linke), 녹색당(Grüne)이기에 진보적인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진보의 정신으로 지난 6월에 베를린 시의회는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이른바 반차별법(Landes-Antidiskriminierungsgesetz, LADG)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제1조 1항에 명기된 목적은 "모든 형태의 차별의 억제와 제거, 더 나아가 다양성의 가치 함양"이다. 제1조 2항에서는 "이 법 적용 범위는 모든 공권력 행사에서 인종, 출신 민족, 성차, 종교, 세계관, 장애, 연령, 성적 지향, 사회적 지위에 의한 모든 차별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제1조 4항에서는 이 법이 "다른 개별법에서는 제대로 적용할 수 없는 구조적·제도적 차별에 관련된 사안에 적용"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법 제10조에서는 "제1조 2항에 명기된 이유로 어떤 사람이 차별을 받았는지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을 경우 이 법의 규정을 어기지 않았다는 근거를 그 상대방이 제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돼 있다. 곧 공권력의 차별을 당한 시민이 법정에서 차별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 행사자가 그러한 차별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법은 한마디로 국가의 공권력도 법 앞에서는 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는 객체라는 원칙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베를린 시정부의 조치에 독일연방정부 내무부 장관으로 보수파의 선봉인 세호퍼(Horst Seehofer, 1949-)까지 나서서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결국 법질서를 유지하는 공권력 행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지방자치주의의 미국에서는 연방정부의 장관도 주정부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는 없다. 그것이 독일이다. 그리고 그런 장관의 비난을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 베를린이다.     


이런 베를린 정신은 역사에서 배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독재와 억압은 결과적으로 주민만이 아니라 정치가들 자신에게도 피해가 돌아와서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이다. 더구나  베를린은 동서로 갈라놓은 베를린 장벽으로 세계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직접 체험한 도시이다.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하여 권력과 제도의 존재 의미를 지배와 통치가 아니라 더불어 살기라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베를린 대성당 전경


베를린시에는 슈프레(Spree)와 하벨(Havel)이 주요 하천지이만 그 밖에도 많은 작은 강과 호수 숲이 산재해 있다. 지형 자체도 다양성을 말해준다. 흔히 사람들은 독일이 중앙집권적인 질서와 규율만을 강조하는 나라로 ‘잘못’ 알고 있다.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은 신성로마제국 시대부터 참다운 의미의 통일을 이루어본 적이 없는 나라다. 군주제가 무너지고 나서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역시 완전한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분열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통일체를 구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3제국 곧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이다.      


그런데 왜 제3제국인가? 유럽 역사에서 최초의 제국은 로마제국(Römisches Reich)이다. 로마제국이 와해되고 군웅할거가 이뤄지다가 새워진 신성로마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이 독일의 입장에서 볼 때 제2의 로마제국이다. 그리고 이 제국마저 무너지고 나서 다시 세운 것이 바로 제3제국(Drittes Reich)이다. 그런데 이 제3제국이라는 용어는 중세 때부터 기독교에서는 종말 이후의 성령이 통치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많은 독일 사람들은 이제 모든 고난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믿었다. 히틀러는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주일마다 미사를 드렸다. 그래서 그도 이 개념에 대한 이해는 충분했을 것이다. 제3제국은 단순히 독일제국의 부활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천년왕국의 시작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직자들도 열광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래서 많은 가톨릭 신부와 주교 그리고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히틀러를 따르자는 열변을 교회 안에서 토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한 독일이기에 비록 외적으로는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이라는 단일 국체를 이루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철저히 지방자치적인 16개의 주로 이루어진 연방 국가이다. 동서독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러한 정신에서 베를린 시정부는 절반은 주권국가(teilsouveräner Gliedstaat)인 주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면 독일이지만 독일이 아닌 기분도 느끼게 될 것이다. 문자 그대로 코즈모폴리턴의 분위기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과 자유와 다양성의 의미를 제대로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를린 시내의 브란덴부르크토어 전경


시내에서 보이는 건물들은 제국의 향기가 가득하다. 브린덴부르크토어(Brandenburg Tor)는 프러시아의 빌헬름 2세(Friedrich Wilhelm II, 1744-1797)가 바타비아 공화국의 반란을 제압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그리고 연방의회(Bundestag) 건물은 원래 1894년에 완공된 독일제국의 제국의회(Reichstag) 건물이었다. 이 의회는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도 존속되었고 히틀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청산을 건물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로 추구하는 독일인들의 정신이 의회 건물에도 반영된 것이다. 의회 건물과는 달리 정부 건물은 매우 현대적인 정부 구역(Regierungsviertel)에 모여 있다. 창조적 파괴를 통한 과거와 현대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고 싶다면 베를린은 꼭 가야 한다. 그리고 슈프레 강을 따라 10km 정도 이어지는 운하(Landwehrkanal)를 따라 구경하다 보면 베를린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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