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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24. 2020

독립국의 국립대학의 도시 뮌헨

독일 10대 명문 대학도시 시리즈


뮌헨 올림픽 경기장 전경


뮌헨은 공식적으로는 바이에른 자유국(Freistaates Bayern)의 국가 수도(首都)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연방공화국(Bundes Republik Deutschland)에 속하는 주로 편입되어 독일의 주가 되었다. 외교와 국방은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연방정부에 위임하되 정치적으로는 바이에른 정당인 기사당(Christliche-Soziale Union)은 바이에른 주이자 국가만을 대표하는 정당이다. 그러면서 일반 정당인 기민당(Christliche Demokratische Union)과 연합하여 하나의 정당처럼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바이에른 방송을 보면 방송이 종료될 때 독일 국가를 연주하고 이어서 바이에른 국가도 연주한다. 여기에서 바이에른의 법적 지위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이에른에는 자체적인 헌법이 있고 바이에른 의회도 따로 있다. 바이에른 주지사는 동시에 바이에른 자유국의 수반이기도 하다.      


바이에른 자유국은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설 때 독일사회민주당(SPD) 당원으로서 당시 주지사였던 아이스너(Kurt Eisner, 1867-1919)가 바이에른 왕국에서 분리된 독립국가를 선언하면서 탄생하였다. 바이에른 주는 중세 초기부터 카롤링거 왕조에 속한 바이에른 공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180년부터 1918년까지 700여 년 동안 비텔스바흐 가문(Haus Wittelsbach)이 바이에른 지역을 통치해왔다. 그 이후에도 바이에른은 외부 간섭을 배제한 독립국으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이에른은 독일 다른 지역에 비해 강력한 지방색을 지닌 주가 되었다. 흔히 베엠베(BMW) 자동차의 엠블렘으로 잘 알려진 바이에른 국기도 바이에른 국가가 연주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데 이 국기의 문양도 이 비텔스바흐 가문의 보겐 백작(Grar von Boden)의 문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게 매우 별난 바이에른은 인구 1,300만 명의 국가로 독일연방공화국에서 가장 면적이 크고 인구도 독일에서 2위인 나라이자 주이다. 그래서 바이에른의 독일에서의 지위는 매우 강력하다.     


옥토버페스트 전경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바이에른 주의 주도인 뮌헨도 특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뮌헨은 고색창연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현대적 산업과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베멤베(BMW)만이 아니라 알리안츠 보험회사(Allianz)와 지멘스 그룹(Siemens)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당연히 독일에서도 매우 부유한 도시답게 물가, 특히 부동산 가격이 높기로 독일에서 그 악명이 자자하다.      


사실 뮌헨이라는 이름의 도시는 1158년에 언급되지만 정작 이 도시가 언제 수립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중세와 근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뮌헨은 역사적 격동기에 늘 중심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히틀러 나치 정권과의 밀접한 관계로 연합군의 주 폭격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구도심의 90% 도시 전체의 50%가 문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그런데 이 결과로 뮌헨은 과거의 모습의 복건과 더불어 초현대식 하이테크 도시의 면모를 동시에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동서독의 분단이 바이에른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구동독 지역에 있던 기업들이 대부분 바이에른 지역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1972년 제20차 올림픽 대회를 개최한 뮌헨은 팔레스티나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하는 비극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올림픽을 기화로 뮌헨의 도시는 한층 더 현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92년 뮌헨 공항(Flughafen München Franz Josef Strauß)이 건설되면서 구공항 지역에는 대규모 전시장(Messestadt Riem)이 들어섰다. 또한 2002년부터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뮌헨은 예술의 도시로서의 면모도 일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뮌헨은 오래된 도시이면서도 독일에서 가장 현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뮌헨의 시거스토어(승리의문)


이러한 도시 분위기를 충분히 반영하는 뮌헨대학교(Ludwig-Maximilians-Universität München)는 원래 1472년 루드비히 9세 공작(Herzog Ludwig IX, 1417-1479)이 잉골슈타트(Ingolstadt)에 설립한 것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초기에는 중세의 모든 대학고 마찬가지로 철학, 의학, 법학, 신학을 가르쳤다. 현재에 이르러 뮌헨대학교는 학생 수 51,000여 명 교직원 14,000여 명으로 독일에서 2위의 규모를 지닌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뮌헨의 인구가 140여만 명이고 주변까지 합치면 수백만 명이 되기에 학생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18개 학부에서 150개 학과가 운영 중으로 교수진만 700명이 넘는다. 다른 독일의 대학들과 가지로 대학 건물은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대학의 중심 건물들은 뮌헨의 도심 북부에 모여 있다. 노벨상 수상자는 13명으로 규모에 비해 적은 편이다. 1549년부터 1773년까지 뮌헨대학교는 예수회가 운영하였고 종교개혁에 맞선 반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될 만큼 보수적인 가톨릭의 학풍이 강한 전통을 이어왔다. 18세기 말에 들어와서야 계몽주의를 일부 수용할 만큼 보수적이었다. 바이에른 주 자체가 독일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기에 대학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800년대 초반 프랑스 군의 침공으로 위협을 느낀 막시밀리안 1세 왕(Maximilian I, 1756-1825)이 대학교를 잉골슈타트에서 란스후트(Landshut)로 옮겼다. 그리고 1826년에 다시 루드비히 1세 왕(Ludwig I, 1786-1868)이 현재의 자리로 다시 대학교를 이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뮌헨 대학의 공식 명칭에 이 두 왕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뮌헨 대학교는 다른 유서 깊은 독일 대학에 비하여 새로운 변화에 더 잘 적응하는 현대적인 대학이 될 수 있었다고도 하겠다. 이는 도시 뮌헨의 운명과도 동일하다. 특이하게도 가장 보수적인 바이에른이 역사 안에서 가장 격심한 변화를 겪었다. 대학교도 마찬가지이다. 나치 정권이 득세할 무렵인 1933년 뮌헨의 쾨니히플라츠(Königsplatz)에서 독일판 분서(焚書) 사건이 발생했다. 곧 나치의 정신에 맞지 않는 책을 모아 시내 한가운데에서 태워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역정을 바로 이 뮌헨의 술집에서 시작한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보니 대학 시설의 80%가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도서관의 장서 가운데 3분의 1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파괴는 창조의 어미니 아니던가! 1967년 뮌헨대학교 역사상 처음으로 개신교 신학부가 개설되었다. 학교 설립 500여 년 만에 벌어진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또 말하지만 뮌헨대학교는 뮌헨 도시와 마찬가지로 극도로 보수적인 정신은 현대적 건물에 담아내고 있다. 대학본부와 중요한 건물들은 대부분 도심 북쪽의 루드비히슈트라쎄(Ludwigstraße) 부근에 많이 몰려 있다. 기차역에서 내려서 약간 멀기는 하지만 대부분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다.     


뮌헨 시내의 마리엔풀라츠


그런데 이 보수적인 동네에도 새 바람이 불기는 하나보다. 난공불락이던 기사당이 바이에른 의회에서 힘을 못쓰고 사민당(SPD)과의 연정으로 겨우 버텨오다가 아예 2020년 선거에서는 대패하여 녹색당(Bündnis 90/Die Grünen)과 사민당에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이 보수적인 동네에 새 바람이 불지 지켜볼 일이다.     


워낙 격변이 심한 동네라서 뮌헨에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먼저 시내 중심지인 구도심의 마리엔플라츠(Marienplatz)에 가보면 신청사 구청사가 나란히 서 있고 그 곁에 마리엔소일레(Mariensäule)도 서 있다. 이 마리안플라츠는 남북대로와 동서대로가 교차하는 곳이기에 당연히 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 구도심이지 제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잿더미가 된 지역에 디시 지은 건물들이 즐비하기에 유서 깊은 건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시 당국이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신구의 조화를 모색한 흔적을 느낄 수는 있다. 


프라우엔키르헤의 성모 동상


마리안플라츠 북쪽에 있는 뮌헨의 상징과 같은 성당인 프라우엔키르케(Frauenkirche)의 원래 명칭은 우리의 사랑 하올 여인의 대성전(Dom zu Unserer Lieben Frau)이다. 곧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다. 이 성당은 1494년 준공된 것으로 북쪽 탑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올라가 볼 수 있다. 웅장한 규모의 이 성당에서는 한 번에 2만 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내부가 크다. 마리안플라츠 서쪽에 있는 칼스토어(Karlstor)는 원래 노이하우저토어(Neuhauser Tor)였던 것으로 14세기에 지어진 성곽의 일부이다. 현재는 그 성곽이 다 무너져 그 흔적으로는 이 칼스토어와 더불어 이사르토어(Isartor) 센드링어토어(Sendlinger Tor)만이 남아 있다. 독일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뮌헨에도 많은 성당과 근세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마리엔플라츠 남쪽의 알테 페터 성당(Alte Peter)가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바에에른 뮌헨 축구장


뮌헨 시내에 가장 중요한 네 거리를 들어 본다면 막시밀리안슈트라쎄(Maximilianstraße), 브리너슈트라쎄(Brienner Straße), 루드비히슈트라쎄(Ludwigstraße), 프린츠레겐덴슈트라쎄(Prinzregentenstraße)가 있다. 공부하다가 답답하면 이 거리로 나오면 스트레스가 풀릴 것이다. 그래서 특히 한국의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살다가 뮌헨대학교로 유학을 간 경우에는 뮌헨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에는 독일만이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 최고의 바이에른 뮌헨 축구 클럽(Fußball-Club Bayern München e. V.)이 있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가장 유명한 맥주가 넘쳐난다. 그 유명한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열리는 곳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축구를 좋아하고 맥주를 좋아하고 대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도시에서 머물러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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