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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22. 2020

언제나 열린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

독일 10대 대학도시를 찾아서 시리즈

하이델베르크 성 전경


하이델베르크는 백조의 성만큼이나 독일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프란츠 왕자(Karl Franz)와 술집 종업원 카티(Cathie)와의 로맨스를 그린 1954년 뮤지컬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마리오 란자(Mario Lanza,)의 목소리를 더빙하여 왕자 역할을 한 퍼덤(Edmund Purdom, 1924-2009)이 부른 ‘축배의 노래’의 배경이 된 [상상 속의] ‘하이델베르크의 술집’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이 영화는 미국의 MGM 영화사 스튜디오에서 촬영하였기에 실제 하이델베르크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 영화는 원래 192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헝가리 출신 미국 작곡가인 롬베르크(Sigmund Romberg, 1887-1951)의 뮤지컬 작품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뮤지컬이나 영화로 제작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광지가 아닌 대학도시로서 하이델베르크의 역사는 유구하다. 1386년 신성로마제국의 3대 독일어권 대학교로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현재 학생수가 28,000명 교직원 15,000명에 이르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대학교이다. 12개 학부의 100여 개 학과에서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는 29명에 이른다. 학부 과정은 거의 독일어 수업이지만 대학원부터는 영어 수업도 많이 진행된다. 한 해에 1,000명 정도의 박사가 배출되는데 그 가운데 3분의 1이 외국인들이다. 130개 국가에서 온 외국인 학생은 전체 학생의 20%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많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건물


하이델베르크대학교가 설립된 역사가 독특하다. 아비뇽 유수(1307-1377) 직후인 1378년 유럽에서는 아비뇽과 로마에서 동시에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부터 지속적으로 서로 갈등을 벌이던 정치 세력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타협을 하게 된다. 이때에 신성로마제국은 로마 편을 들게 되었다. 이에 파리 대학교에 있던 독일 교수와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프레흐트 1세 백작(Ruprecht I, 1309-1390)은 우르바노 6세 교황(Urbano VI)의 허락을 받아 파리대학교를 벤치마킹한 하이델베르크대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그런데 1518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강의실에서 벌인 이른바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er Disputation) 이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학자들은 종교개혁의 선봉대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1563년 개신교 신앙고백의 유명한 문서인 하이델베르크 교리서(Heidelberger Katechismus)가 여기에서 선포된다. 이 문서의 원래 제목은 ‘Catechismus oder christlicher Vnderricht, wie der in Kirchen vnd Schulen der Churfürstlichen Pfaltz getrieben wirdt’이다. 직역해 보면 ‘팔츠 선체후의 교회와 학교에서 활용되는 교리서 또는 기독교 강의’이다.


 

하이델베르크 라트하우스

    

16세기에 들어서서 하이델베르트대학교에 인문주의 학자들이 몰려들게 된다. 그러나 30년 전쟁(1618-1648)을 하이델베르크도 피해가지는 못했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의 루이 14세 왕(Louis XVI)의 침공으로 1693년에 하이델베르크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이후 하이델베르크는 반종교혁명의 영향으로 예수회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리하여 예수회가 대학교 건물을 복원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예수회가 힘을 잃자 1773년 프랑스의 나자로 수도회가 하이델베르크대학교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이 대학교가 본격적으로 재건된 것은 전적으로 테오도르 선제후(Karl Philipp Theodor, 1724-1799) 덕분이다. 학교 조직을 재건하고 정치경제학과를 신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뤼네빌 조약(Paix de Lunéville, 1801)으로 라인강 서쪽에 있던 학교 재산을 모두 상실한다. 하이델베르트대학교는 다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그러다가 1803년 바덴공국의 프리드리히 대공(Karl Friedrich, 1728-1811)의 노력으로 학교가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가 아니었으면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베르크대학교의 공식적인 교명이 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가 된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하이델베르크대학교는 명실상부한 독일의 명문대학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우수대학 육성정책에 따라 우수대학교를 선정해왔다. 현재는 2019부터 2026년 기한으로 11개 대학이 여기서 선정되어 있다. 여기에는 RWTH Aachen, Berlin University Alliance, Universität Bonn, Technische Universität Dresden, Universität Hamburg, Universität Heidelberg, Karlsruher Institut für Technologie (KIT), Universität Konstanz, Universität München, Technische Universität München, Universität Tübingen가 속한다. 이는 여기에서 소개하는 대학도시와 중첩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금 소개하는 대학교들은 유서 깊은 대학도시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하이델베르크로 가보자. 넥카강 서안에 자리 잡은 구도심(Altstadt)의 중심에는 쾨니히슈툴(Königstuhl)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하이델베르크성(Heidelberger Schloss)이 있다. 인구 16만 명인 하이델베르크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프라이부르크에 이어 5번째로 큰 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비교적 온전히 견딘 덕분에 1689년과 1693년에 프랑스군에 의해 초토화된 이후의 재건한 건물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구도심에는 1.6km의 보행로가 있는데 유럽에서 가장 긴 보행자 전용구역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하이델베르크의 유명한 건물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가장 유명한 성은 1182년 프리드리히 1세 황제(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의 이복형제인 콘라드(Konrad der Staufer, 1136-1195)가 도시의 수비를 위하여 세운 요새였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프랑스군에 의해 초토화된 다음에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아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만 복원된 형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오히려 고전적 비장미를 보여주어 더 유명하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의 알테 브뤼케


넥카강 위에 놓인 구다리(Alte Brücke)도 이 도시의 명물이다. 정식 명칭은 칼-테오도르 다리(Karl-Theodor-Brücke)로 1788년에 완성된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13세기부터 8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가 부서져 다시 지어졌다. 새로 다리를 지을 때마다 원래 있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으로 적어도 기초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영양을 많이 받은 도시답게 시내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시내 한복판에 있는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가 가장 유명하다. 원래 이 자리에는 전설적인 도서관(Bibliotheca Palatina)이 있었다. 그러나 30년 전쟁 때에 약탈되어 그 대부분의 책이 현재 교황청의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교회는 약 90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베드로 교회(Peterskirche)이다. 이밖에도 박물관과 극장을 비롯한 많은 유명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술집과 학생감옥도 있다. 끝으로 약 2km 정도 되는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도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입구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대부분 학교 건물이 늘어선 것을 보게 된다. 이 길을 왜 철학자의 길이라고 부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곳 학생들이 즐겨 걸으며 사색하던 길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바라 본 구시가 전경


하이델베르크가 매우 오래된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12세기에 처음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곳이다. 물론 석기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5세기경 켈트족이 거주한 흔적도 보인다. 그리고 로마제국 시대인 서기 70년 경부터 하이델베르크의 행정구역에 있는 노이엔하임(Neuenheim)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다리는 서기 200년 경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870년에 이곳에는 수도원이 들어섰다.      


대학도시답게 도시 전체에 대학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관광객들로 붐빌 때 공부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많아서 활기찬 면도 있다. 그리고 인구도 1, 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늘어난 곳이라 어느 모로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도시이기도 하다.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도시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교훈이 무색하지 않아 보인다. semper apertus. 언제나 열려 있는 도시와 대학. 그것이 하이델베르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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