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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니엘 Caminero Aug 20. 2017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여행 이야기 - 4

여행을 좀 더 즐겁게 해주는 마법의 액체, 맥주

나는 어디를 여행하든 그 나라, 그 도시의 술을 적어도 두어 개쯤은 접해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일 따위에 '노력'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싶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 이런 마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실 여행지에서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알코올에 대한 경계심을 어느 정도는 풀기 마련이니 그런 여행 태도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여행 중인 지역의 술은 꼭 마셔보려 한다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다분히 의무감 섞인 의식적인 행동인데, 로컬 알코올을 찾아나서는 일이 단 한 번도 귀찮거나 번거로웠던 적은 없다. 현지의 술, 그 첫 입맞춤은 언제나 설레고 즐거웠다.

주로 혼자 여행하는 경우가 많았던 나는 거의 매일 하루의 여행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바나 펍에 들렀다. 잠들기 전 홀로 한두 잔 술을 마시는 일은 하루의 여행을 정리하는 마침표인 동시에 다음날의 여행을 준비하기 위한 쉼표이기도 했다. 7~8년 전쯤, 일본 도쿄를 9박 10일간 여행했을 때는 호텔 근처 바에 매일 같이 방문했다. 여행 중 얼마나 자주 그 바에 들렀던지 바텐더, 웨이터, 단골손님들과 마치 친구가 된 것처럼 대화를 하곤 했다.


처음 갔던 날은 할 줄 아는 일본어가 거의 없어 영어에 아는 일본어 몇 개를 섞어 얘기를 이어갔는데, 한 일주일이 지나자 기대 이상의 일본어 능력이 부지불식 생겨버려 바의 사람들과 제법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됐다. 내게 특별한 언어 능력 같은 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때의 일시적 언어 능력 상승은 순전히 알콜의 마법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마법이 모두 풀려 그때와 같은 일본어 능력은 온데간데없다. 그때 가장 자주 마셨던 술은 지마(Zima)라는 맥주였다. (일본 여행 중 처음 알게 된 술이었고, 일본어처럼 느껴지는 네이밍 탓에 당연히 일본 맥주인지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 알고보니 사실 미국 제품이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우연히 축구장에서 옆 자리에 앉게 되어 가까워진 브라질 친구 필립과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맥주 낄메스(Quilmes)를 낄낄거리며 마셔댔던 기억이 난다. 나는 평소 한 사람의 남자로서 ‘남자는 단순하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온 몸으로 부정하며 살아왔지만, 그날 이후로 생각이 좀 달라졌다. 30년간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왔던 두 남자가 생전 처음 만나 축구 한 게임을 같이 보며 맥주 몇 캔 나눠 마신 것만으로 그렇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니 남자가 단순하다는 건 어느 정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됐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마셨던 삘센(Pilsen)은 맛을 떠나 그 놀라운 사이즈 때문에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무려 1리터나 되는 병맥주였기 때문이다.(정확히는 950ml) 1리터를 넘는 대용량의 맥주는 페트병에 담겨 있는 것만 봐왔던 터라 유리병에 담긴 1리터짜리 맥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속된 말이지만, 1리터 맥주를 ‘병나발’ 부는 건 굉장히 신나고, 흥분되면서 심지어 뭔가 좀 뿌듯하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평생 리코더나 불던 내가 처음으로 호른이나 튜바를 잡아본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삘센은 맛에 남다른 특색이 있진 않았다. 뭔가 좀 담백하고 묽은 전형적인 필스너 느낌이어서 '삘이 센 맥주'라고 수식하기는 어려웠지만, 우루과이에서 마셨던 네댓 개의 로컬 맥주 중 내 입맛에는 가장 잘 맞아서 거의 매일 한두 병은 마셨던 것 같다. 물론 그 1리터짜리 병맥주로. 여행 중 만난 우루과이 친구들은 대부분 자국 최고의 맥주로 파트리샤(Patricia)를 추천해줬지만, 섹시하고 강렬한 그녀는 내 타입이 아니었다. 영 부담스러웠다.

사실 맥주가...맥주는 마시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겠냐만 여행지에서 만나는 술은 늘 새롭고 특별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감정으로 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사는 동안 생각만큼 자주 오지는 않는 것 같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그래서 나는 여행하는 기분으로, 특별한 감정과 분위기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어 세계 곳곳의 맥주를 맛볼 수 있는 맥주전문점을 즐겨 찾는 편이다. 몇 년 전 어느 나라에서 누군가와 함께 마셨던 맥주를 선택해 옛 일을 추억해보기도 하고, 새로운 맥주를 통해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을 미리 맛보기도 한다......는 그냥 하는 말이고, 사실 마실 수 있는 술이 맥주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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