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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Aug 29. 2019

사십

나이 마흔이 되면 정말로 세상 유혹에 초연할 수 있을까?

최승자 시인은, '삼십세'라는 시에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라고 서른 살을 묘사했다. 꽤나 그럴싸한 문장이라 한동안 외고 다녔다. (1981년에 초판이 나온 <이 時代의 사랑>(문지시인선) 30페이지에 실려 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은 온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알듯 말듯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표현이 멋져서 이 기사 저 칼럼에서 잘난 척 몇번 써먹긴 했으나(바로 이 글 첫문장처럼) 모르고 쓴 말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여자의 서른과 남자의 서른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많은 여자들은 서른을 충격으로 받아들인다(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 남자들은 헛기침 한 번으로 서른살을 뚝딱 먹어버린다(지금도 그런 것 같다).


헌데, 남자에게 마흔은 다르다(여자의 마흔도 다를까? 아마 다르겠지). 나는 사십살이 되던 첫날,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혼자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새벽을 맞았다(이렇게살수도이렇게죽을수도없네 어쩌고 하면서 시를 쓰려고 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 친구들이나 먹는 연세를 내가 먹는단 말이지, 하는 어설픈 비애감에 젖어. 그것도 잠시 그뿐이었지만 마흔은 서른 그때와 마주치는 감흥이 사뭇 다르구나, 깨달았다(진짜 아저씨가 되었기 때문일까). 여튼...


돌아보면 나의 사십대는 힘겨웠다.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했다. 곡절이 많았다. 좋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책임과 늙음이 한꺼번에 왔다. 몸이 그랬고 정신이 그랬고 가정사가 그랬고 직장이 그랬고 관계가 그랬다. 더 이상 청년도, 원숙한 아저씨도 아니었다. 언제나 속살은 삼십 같은데 문득 1년이 10년처럼 얼굴이 변신하던 시간이기도 했다. 이룬 것 없고 이루고픈 건 다늦은 것 같은, 이렇게 살기도 어색하고 이렇게 죽기도 안타까운, 그런 애매한...


사십은 공자가 말한 바, 불혹(不惑)이라 한다. 뜻풀이 그대로 무엇에 유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거다. 마흔을 먹으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건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공자의 말이 맞다면 그는 그런 뜻으로 썼을 것 같지 않다. 아니라면 그는 사십 전에 죽은 사람이거나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겠지. 사십대를 제정신으로 한 번 살아보라. 과연 절로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무게중심이 잡히는지. 천만의 말씀이다. 확신컨대 일생 중 가장 유혹이 많은 나이가 사십대라고 본다.


작가 김연수는 이렇게 썼더라. <그렇다면 불혹이란 '현혹되지 않다', 그리고 더 나아가 '뭔가에 홀리는 일 없이 제정신을 차리다'는 뜻이겠고. 따라서 사십대란 '무엇에도 홀리지 않고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나이'가 된다.> 

아, 사십 넘은 그대여, 저엉~말이신가???


중요해서 다시 말한다. 단언코 40대는 유혹이 많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뒤흔드는 게 많아진다. 도처에 유혹이 깔려 있다.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만큼. 공자를 비웃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본다. 삼십에 뜻이 세워지던가? 사십에 미혹되지 않던가? 오십에 하늘의 명을 알고 육십에 귀가 순해지던가?


삼십에는 아무 생각이 안 들고, 사십에는 불안해서 미치겠으며,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긴커녕 밥벌이에 뼈가 빠지고, 육십에는 남이 하는 모든 소리가 고깝게 들리진 않는가? 나는 감히 이게 현생을 사는 장삼이사들의 평균이라고 본다. 공자왈, 본인은 위인이시라 "남들은 모르겠고 나는 이랬거든?" 한 거라면 할말이 없지만 그의 폼 나는 자소서 한 구절을 가지고 '인생, 대체로 이렇게 됩니다'라고 푸는 건 실로 웃기는 얘기다.


그러니, 오히려 '이렇게 되더라'가 아닌 '이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로 풀어야 그럴싸하지 않을까 한다. 모름지기 남자는, 삼십에 뜻을 세우고(세워지는 게 아니라) 사십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미혹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아차리며, 늙어가며 뭐든 서운해지는 육십이 되면 이런저런 온갖 소리에 신경 좀 끄고 못들은 척 귀를 순하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몹시 중요해서 거듭 말하지만, 사십대는 유혹이 많더라. 나의 사십대는 걸음마다 발길마다 온갖 유혹의 진창이었다. 수시로 발이 빠졌고 흙탕이 튀었다. 그래도 돌아보니 대체로 잘 지나왔더라. 그래, 아주 자빠지진 않고 끝내 사십을 통과했더라. 지겹고 길었던 나의 사십대. 불행하진 않았을지언정 사뭇 뜨겁고 아팠던 사십대였다. 이런 사십을 지나노라니 하아, 이제야 겨우 오십이로다.


오십을 기다렸다. 나의 오십대를 기대한다. 이제야말로 화양연화, 호우시절을 구가할 것 같은 기대감으로 설렌다. 하늘 뜻을 조금은 더 알게 되고(하늘의 뜻이 뭐겠나. 가치없고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지 말란 것일 테다.) 사는 이유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풋나기가 아니다) 이제는 가끔씩 아직 오십도 못된 애송이들에게 좀 더 나이스하게 훈계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녕, 길고도 힘겹던 사십대야. 목욕재계 대신 방 청소를 하고 오십대의 첫글을 이렇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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