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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Sep 18. 2019

치약을 바꾸면 생기는 일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방법에 대하여.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거대한 주제가 문득 머리에 솟은 것은 아니고 원고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의가 아닌 강제에 의해 무언가 골똘히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 풍요로운 인생을 누린다고 할 수는 없는 입장이지만 그때 고민 끝에 생각한 결론은 꽤 그럴싸했다.


나는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잡지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잡지에는 수많은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쓸모 없는 것들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쓸모 없다는 표현은 다소 거칠지만 그렇다고 가치 없는 것, 수준 낮고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쓸모는 효율과 편리를 제공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들, 굳이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것들, 쓸모와는 관련이 적은 것들이 삶을 훨씬 즐겁고 생동감 있게 만든다. 생활이 필수품으로만 채워져 있다면, 일상이 쓸모로 가득한 삶이라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쓸모 없는 일이 무엇일까? 꼭 필요하지 않으나 하면 재미 있는 일, 안 해도 그만이고 몰라도 되지만 해보면 즐거운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일상적이지 않은 일, 평생에 한 번 겪지 못할 수도 있는 일, 모르고 살아도 그만이었을 일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이런 습관은 일상을 조금 다르게 관찰하는 시각을 만든다. 그것이 보편 타당하지 않거나 정답이 아닐지라도 그러하다. 이런 결론에는 굳이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


나는 욕실 비누를 가능한 좋은 것으로 쓴다.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기분을 전환하는 일은 이렇게 간단한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바닷가 드라이브나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처럼 번거로운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비누를 다 쓰기 전에 새 걸로 바꾸는데 향이 바뀌는 것만으로 기분이 달라진다. 물론 샴푸도, 바디크림도 그렇다. 심지어 맛이 다른 치약도 같은 효과를 낸다. 조금 과장하자면 쓸 때마다 어딘가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이 난다.


이런 쏠쏠한 효과를 경험으로 아는 나는 이런저런 욕실 용품을 잔뜩 구비하고 있다. 강조하거니와 멋 부리기 위함이 아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멋이란 부리면 부릴수록 구차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기분 전환용이다. 물론 이런 삶을 영위하는 데 사소한 문제가 없진 않다. 자질구레한 걸 못 견디는 아내는 이런 남편의 취향을 무시하고 번번이 욕실을 싹 치워선 자기 기분을 환기하곤 한다. 가끔은 출근할 때 향수를 아주 조금 재킷 안에 뿌리는데 매번 등 뒤의 서늘한 시선을 느낀다. 주책이란 면박이겠지. 대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억울한 말씀 마시라. 아주 작은 것으로도 기분이 환기되고 완전히 다른 하루를 살 수 있다. 어쨌든 내 주장은 이렇다. 삶이 풍요롭기 위해 뭔가 거창한 변화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


내 차 송풍구에는 마카롱 하나가 붙어 있다. 정확히는 마카롱이 아닌 마카롱 모양 방향제다. 휴대용 선풍기 뒤에 붙여 바람에서 향기가 나도록 고안된 제품인데 휴대용 선풍기를 쓰지 않는 나는 이걸 차 안에서 사용한다. 차량용 방향제는 대개 화학제품이라 향도 강한 데다 금방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픈데, 우연히 알게 된 이 천연 성분 방향제는 차에 탈 때 기분을 금방 좋아지게 만든다. 모양도 컬러도 귀여워서 동승자가 내 취향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은근히 즐겁다.


우리 집 거실에는 김명곤 작가의 2015년작 ‘꿈을 싣고 온 자동차’ 판화 한 점이 있다. 벽에 걸지 않고 마루에 세워 슬쩍 기대 놓았는데 작은 그림 액자가 집 분위기를 산뜻하게 만든다. 식탁에 앉아 그림을 가만 쳐다보면 기분이 사뭇 좋아진다. 그림 속 비현실에 조금씩 끌려드는 느낌.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이래서 사람들이 그림을 사고 벽에 거는 건가 생각해본다.


인생에 치약 맛 따위가 뭐 그리 소중하랴. 하지만 맛이 다른 치약으로 양치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데 공감한다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집에 그림 몇 점 멋스럽게 걸어둘 것이고 도로변 화단의 흔한 꽃 이름 네댓 개 정도는 쉽게 욀 것이다. 어쩌면 고리매듭을 잘 묶거나 플라이를 능숙하게 던질 수도 있겠고.


사는 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면, 그는 앞으로도 오늘 같은 내일을 살아야 한다. 쓸모와 효율로 가득한 생활. 그것도 감사한 일이겠으나 한편 퍽 가여운 인생일지도 모른다. 동의한다면, 쓸모 없는 일 하나쯤 궁리해 두는 건 어떨까? 지금 필요치는 않으나 언제든 실행할 수 있는 불필요한 활동 말이다. 당장 생각나지 않는다면 우선 욕실 선반에 비누라도 몇 개 좋은 걸로 사다 두면 좋겠다.

(인생 별 거 없다고 노인처럼 중얼거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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