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당신은 내게 그깟 스쿠터도 못사게 했지만 나는 당신에게 무려 BMW를 .

by 수페세

아내가 이 글을 읽지 못할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용감하게 첫 문장으로 써본다. 나중에 아내에게 BMW X7을 선물해 주겠노라고. 그런데 그래도 될까? 내 기억으로 아내는 '차'에 관한 한 내게서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받을 만한 ‘이쁜 짓’을 한 적이 별로 없다. 이쁜 짓은커녕 오히려 사소한 일로 내 가슴에 비수를 꽂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 번은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말로 “나도 스쿠터 하나 사고 싶다”라고 모기 소리만큼 중얼거렸을 뿐인데 그걸 용케 알아듣고선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국물도 없다”는 식으로 으르렁거리셨다. 아니~ 이건, 마치 애지중지 키운 딸이 어느 날 불한당 같은 녀석을 신랑감이랍시고 데려왔을 때나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던가.


상심한 나는 평생 스쿠터의 ‘스짜’도 꺼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바퀴 두 개짜리 기계를 산다면, 내가 혼자 살 거나 당신이 혼자 살게 될 것(쳇. 그 말이 그 말 아닌가?)’이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과연 진짜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혼자 살 자신이 없는 나는 결코 아내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나중에 돈 벌어 말이나 한 마리 살까 조용히 생각할 뿐이다. 말을 산다면 아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다.


X7 얘기를 하다가 말 얘기를 하다니, 좀 흥분한 것 같다. 사실 나는 꽤 점잖은 사람이지만 자동차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 들뜬다. 차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다. 차는 일단 외관이 멋지고 빠르게 달릴 수 있으며 근사한 사운드를 가졌다. 무엇보다 나를 어디론가, 즉 지금 이 곳이 아닌 다른 더 멋진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한다. 내 공간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자유의 쾌감. 아마도 그래서 우리가 운전을 핸들링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 때면 언제나 낯선 곳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속에서 치솟곤 했다. 내가 자동차 여행을 너무도 사랑하는 이유다.


BMW 뉴 X7 클로즈드룸 (2).jpg


내 차를 갖게 된 이후로 정말 많은 곳을 쏘다녔다. 웬만한 국도와 길 끝의 마을들. 해안도로와 강변의 작은 숲길, 오지의 고갯길과 비포장 임도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차를 배에 싣고 서해의 섬과 제주도까지 두루 돌아다녔다. 신혼에 운전을 시작한 나는 그 자동차 여행의 팔할쯤을 아내와 동행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는 주말이면 무조건 차를 몰고 나섰다. 금요일이 오면 아이들은 으레 집을 떠나는 줄 알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내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짐을 꾸렸다.


홍천에서 인제를 거쳐 한계령 넘어가는 길도 좋고, 구례에서 하동, 남해에 이르는 19번국도는 내가 특별히 아끼는 길이다. 무작정 서해의 섬에 들어갔을 때 나오는 배편이 끊겨 좁은 차에서 네 식구가 하룻밤을 보낸 기억, 한겨울 정선 만항재에 올랐다가 우연히 엄청난 함박눈을 만났을 때, 희열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던 순간은 두고두고 우리에게 이야깃거리로 남았다. 살아남은 고생담은 인생의 근사한 자산이다.


멋모르고 쏘다닐 땐 그저 떠나는 게 좋아서 차 종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짐 싣기 만만하고 시트가 편한 차종이면 아쉬움이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좋은 차가 필요해졌다. 사실 차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 욕심은 한도 끝도 없어진다. 힘도 좋아야 하고 연비도 좋아야 하고 크기도 넉넉해야 하고 폼도 나야 하고 운전 재미도 좋아야 하고 등등. 이런 요구를 모두 채우기는 어렵다. ‘뜨거운 아이스 커피, 시럽 없이 달달하게’라는 주문처럼 모순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값비싼 차일수록 이런 까다로운 요구는 어느 정도 해소되지만 이런 결론은 너무나 허무하다.


오랜만에 가슴 뛰는 초대장을 받았다. BMW에서 X7을 국내 선보이기 전에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을 초대해 ‘VIP Closed Room and Track Experience’이라는 이름의 시승행사를 연다는 것이다. 우와. 소수의 VIP를 불러 밀폐된 방에 가둬놓는 행사라니. 이런 건 만사 제쳐놓고 가야 했다. “여보,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으스대고 싶었지만 조용히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 기사가 운전하는 7시리즈가 회사 앞에 도착했다. 귀빈처럼 멋있게 뒷자리 탑승. 주변을 살짝 둘러봤지만, 봐주는 사람이 적어 아쉬웠다. 그래도 혼자 회장님이 된 기분으로 영종도 BMW 드라이빙센터에 도착해 한나절 동안 X7을 깊게 만났고 두루 경험했다.


BMW 뉴 X7 클로즈드룸 (3).jpg


거대한 키드니 그릴, 육중한 체구이면서 균형이 잡힌 X7은 보는 순간 시선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철철 넘쳤다. 화려하면서 정돈된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크리스털 소재의 기어노브는 BMW 럭셔리의 방점 같았다. 운동성능을 테스트할 최적의 장소인 트랙을 몇 바퀴나 돌았는데, X7의 몸놀림은 대형 SUV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날렵했고 안정감이 탁월했다. 차가 크나 작으나 역시 BMW는 BMW였다. 운전이 너무 쉽고 재미 있었다. 7시리즈의 고급스러움을 실내에 그대로 옮겨온 X7의 매력 중 가장 탐스러운 건 덩치 큰 성인 두 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3열 시트. 안락하고 개방감이 커서 6명이 장거리 여행을 하는 데 이만한 차가 없을 것 같았다.


사실 내가 다른 글에서 돈 벌면 아내에게 사주겠다고 약속한 차는 X7이 아니었다. 물론 그 차도 좋은 차이고, 그 말도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땐 X7을 몰랐고 지금은 알았으니 미련 없이 약속을 바꾸겠다. 멋지고 우아하고 고급스럽고 등 최상급 헌사들이 모조리 촌스러워지는 이 멋진 X7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사주고 싶다. 사주고는 내가 운전해서 세상의 온갖 길을 당신과 돌아다니고 싶다.

그러니 여보, 당신은 내게 그깟 스쿠터 하나도 못 사게 했지만 나는 언젠가 당신에게 BMW를 선물할 거야. 그것도 무려 X7을 사 줄 거라고. 물론 그러려면 내가 돈을 아주 많이 벌어야겠지? 그래도 걱정 마. 돈이 아무리 많아도 스쿠터는 절대로 사지 않을 테니까.


2019. 3

사진 : BMW 코리아 제공

keyword
이전 14화내 골프, 그냥 골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