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차를 사드릴 수 있다면, 재규어 XJ를 고를 거다.
아버지는 칠순이 되던 날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어깨뼈 골절과 뇌진탕 증세로 한동안 입원을 하셔야 했다. 나는 중년의 나이가 되고서야 처음으로 아버지의 몸을 만져보았다. 일생이 빈틈 없고 꼬장꼬장하셔서 내겐 늘 엄하고 어려웠던 아버지. 덧없는 세월의 무게가 앙상한 뼈마디에 그대로 느껴져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도 그 불행한 사고가 내게 아주 의미 없진 않았는데 병상 머리맡에서 조근조근 대화를 하며 부자유친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됐단 거다. 그 즈음 잡지에 실을 글을 하나 써야 했는데 주제가 마침 '아버지에게 사드리고 싶은 차'였다. 그때 내가 고민 없이 뽑은 차가 바로 재규어 XJ다. 존경과 사랑을 바치고 싶은 분이 타시기에 어울리는 차. 그럴 수 있다면 지금 아버지에게 재규어를 사드리고 싶다.
수입차가 흔해진 요즘 어지간한 차는 시선을 끌지 못한다. 그런데 재규어라면 스쳐가는 무심한 눈길도 쉽게 잡아챌 수 있다. 그것이 XJ이고 롱휠베이스 모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이유 하나는 여느 프레스티지 브랜드처럼 흔해빠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은 스타일이 남다르다는 거다. 스타일 얘기가 나왔으니 말해보자면 전통적으로 재규어의 스타일은 남과 다른, 남보다 뛰어난 어떤 것이었다.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그의 책 <남자들에게>에서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런 줄 아는 것이 스타일이다"라고 말한 바로 그 의미다. 누가 보아도 "저것은 재규어다" 할 수 있는 스타일. 이전의 디자인과는 확연히 다른, 이안 칼럼이 핸들링하는 오늘날에도 재규어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트렌치 코트 차림의 말쑥한 외모지만 주말엔 터프한 스포츠를 즐기는 영국 남자의 이미지. 이른바 '우아한 다이내믹'을 추구하는 재규어의 스타일이 바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재규어의 정체성은 귀족적 품격이다. 재규어는 롤스로이스, 벤틀리, 랜드로버와 함께 왕년의 화려했던 자동차 왕국 브리티시 킹덤의 얼굴이자 자랑스런 자부심의 일원이다. 'Beautiful fast car' 즉 아름다운 고성능 자동차를 지향하는 것이 재규어의 브랜드 철학이며 그 정점에 XJ가 자리하고 있다. XJ의 역사는 1945년에 발표된 마크IV로 거슬러올라가지만 재규어의 플래그십 모델로 XJ의 이름이 사용된 건 1968년부터다. 이후 영국 왕실과 귀족들의 의전용차로 활약하면서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경쟁하는 영국의 자존심으로 건재해왔다. 하지만 재규어는 단순히 전통에 기댄 고루한 브랜드는 아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항상 당대의 우아한 럭셔리 스포츠 세단으로 진화해왔다.
쨍한 햇살 아래서 만난 재규어 XJ는 한 마디로 아름답다. 다른 표현이 필요치 않다. 와인색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차를 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근사하다. 미끈하고 유려한 차체는 쓰다듬고 싶게 탐스럽다. 그리고 엄청나게 길다. 숏휠베이스 모델만 해도 5m를 훌쩍 넘겨 5122mm에 이르는데 오늘 만난 롱휠베이스 모델은 이보다 125mm나 더 긴 5247mm에 달하는지라 우선 그 장대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열쇠는 또 어찌나 크고 무거운지 조약돌 하나를 쥐는 것 같다. 롤스로이스 열쇠가 이만했던가. 기억나지 않지만 이만한 크기의 열쇠는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아내는 XJ의 열쇠를 보더니 "와. 무기로 써도 되겠네." 했다. 참고로 아내는 그다지 난폭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잔소리가 좀 있는 편인데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양복 주머니에 잡동사니 소지품을 불룩하니 넣길 좋아하는 나를 출근길 현관에서 번번이 면박주는 식. 한 마디로 "사람이 추레해보인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이 열쇠를 내가 들고 다녀야 한다면 저고리에 아령 하나를 넣었을 때처럼 아내의 눈이 쭉 찢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규어 XJ의 오너라면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어야 할 일은 없겠지. 운전기사가 들거나 버버리 가죽 브리프 케이스에 넣는다거나 할 테니까.
재규어 XJ 운전대를 잡았으니 당연히 아버지를 찾아뵈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아버지. 지금 새차 가져가요. 무려 재규어 XJ예요. 그것도 롱휠베이스 버전이라구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버지는 이 말의 후반부를 잘 이해하지 못하실 거기 때문에... 그냥 불쑥 찾아뵙기로 했다. 아버지는 퇴원해 시골집에서 지내시는데 지루한 병원생활을 못견뎌 하셨다. "얘야. 이건 사는 것도 아니다." 경우 바르고 너저분한 건 못 보시는 성미라 더 그러셨던가 보다. 주위의 만류에도 조기 퇴원하신 아버지는 소일로 농사를 하시며 의사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건강해지셨다. 예전처럼 꼿꼿한 걸음걸이로 매일 아침 밭에 나가신다 했다.
3.0리터 디젤 엔진이 이 덩치에 부족하지 않나 싶은 건 몇해 전 5.0SC 슈퍼스포츠 롱휠베이스를 몰아본 기억 때문이다. 5리터 엔진에 슈퍼차저를 단 XJL은 그야말로 위용이 대단해서 롤스로이스를 만나도 기죽을 일이 없을 것처럼 당당했다. 그런데 이렇게 크고 번쩍이는 차에 디젤엔진이라니. 선입견은 그랬다. 왠지 품격이 떨어지진 않을까. 소리도 시끄러울 것이고 힘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런데 시승을 시작하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몹쓸 선입견은 사라져버렸다. 지구라도 정복할 듯 대단한 힘으로 내달리지만 기름도 펑펑 써대는 대형 럭셔리 세단.
이런 차의 주인이 기름값 걱정을 할 것 같은가. 물론 기름값을 걱정하진 않는다. 이런 차의 주인은 최저가 주유소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효율성을 따진다는 것. 부자들도 연비를 생각한다는 거다. 배기가스와 지구환경과의 상관관계를 고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언급하지 않아도 이건 상식에 관한 문제니까. 그러니 제아무리 대형 럭셔리 세단이라 해도 효율성의 문제를 비켜갈 순 없다. 재규어 XJ라 해도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3.0 디젤은 몹시 잘 어울리는 선택이랄 수 있다.
힘 부족도 느낄 수 없었고 소음이나 진동에 의한 거슬림도 전혀 없었다. 요트를 직접 몰아본 적은 없지만 재규어 XJ 운전석에 앉으면 고급 요트를 시승한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어진다. 번쩍이는 크롬 장식의 인테리어와 매무새 좋은 가죽 등 고급스런 소재도 그렇지만 전면부 패널이 마치 요트의 그것처럼 둥그렇게 설계돼 아늑하면서도 안정감을 전해준다. "요트 같지 않아, 이 차?" 그랬더니 아내는 별안간 시댁에 가는 중이라는 당혹감도 잊고 "진짜 그렇네? 근데 어쩜 당신은 그런 근사한 비유를 할 수 있는 거야?" 하면서 맞장구를 쳐준다. 아닌 게 아니라 잔잔한 바다를 가르는 요트처럼 주행감이 미끈하다.
2톤에 가까운 체구임을 감안한다면 움직임이 굼뜰 것 같기도 한데 전혀 주춤거리거나 출렁거림이 없다. 트윈 터보 3.0 디젤엔진은 고속주행으로 달리기 전, 이른바 실용 영역에서는 5리터 가솔린 엔진 부럽지 않은 쾌활한 몸놀림을 보여준다. 2000rpm에서 61.2kg.m에 이르는 강력한 토크가 뿜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가속페달을 오른발로 비벼대는 초고속 주행이라면 당연히 슈퍼차저 가솔린 엔진에 비교할 순 없다. 하지만 우리 도로 여건과 일상주행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 이상의 기대는 과욕이자 부담이다. 앞길이 조금만 트여도 물살을 힘차게 가르듯 이렇게 우아하고 힘 있게 쭉쭉 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게 바로 '엘레강스하고 다이내믹한' 주행인 거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를 달리는 동안 옆자리 사모님은 어느새 잠이 드셨다. 이런 차라면 옆자리 아닌 뒷자리에 모셨어야 하는 건데. 호화로움은 뒷자리에서 더욱 체감된다. 앞시트 헤드레스트 각각에 달린 8인치 AV 모니터가 장착되었고 특별한 Bowers&Wilkins 프리미엄 하이엔드 사운드 시스템이 구성돼 있다. 무려 20개의 스피커에서 1200W의 웅장한 사운드가 뿜어지면 이 이상의 호사는 없다 싶어질 정도다. 럭셔리하면서 클래식한 분위기의 실내는 전통과 첨단을 절묘히 조화시켜 놓은 듯하다. 항공기 프로펠러를 떠올리게 하는 송풍구 디자인만 봐도 쓰다듬고 싶게 어여쁘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건 계기판. 12.3인치 디지털 액정 계기판은 스티어링휠의 스위치 조작에 따라 기본 정보 외에 많은 추가 정보를 눈앞에 띄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내비게이션이나 차체 정보를 표시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좀 과한 느낌이다. 디지털은 럭셔리한 면에서 한계가 있다. 아날로그처럼 선명하지 않아 시인성도 낮다. 인스트루먼트 패널 중앙에 아날로그 시계를 큼직하게 박아두는 건 클래식의 상징이다. 그런데 계기판이 디지털 방식이면 적잖이 아쉽다. 때론 스타일을 위해 기능을 포기해도 좋은 법인데.
우연처럼 읍내 사거리 신호등에서 구형 XJ와 어깨를 나란히 멈춰섰다. 압도적으로 커진 신형에 비하자면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늘씬한 몸매의 구형이지만 당당하다. 절대 낡은 차처럼 보이지 않은 품격은 여전하다. 나이 들어도 품위를 잃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재규어가 지닌 클래식의 힘이다. 이제 10분만 더 달려 저 언덕길을 넘어가면 누렇게 단풍 든 느티나무가 있을 거고 들판 너머 가로등 아래 아버지의 집이 어둠 속에 아슴하게 보일 것이다.
2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