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주느비에브 도서관

by Su
20241123_174355.jpg 생 주느비에브 도서관 출입증 카드


수영장에 이어 파리에서의 두 번째 안전지대는 팡테옹 바로 옆에 위치한 생 주느비에브 도서관이다. 먼저 온라인에서 약속을 잡고 체류증을 갖고 현장을 방문하면 즉석에서 사진도 찍어주고 출입증을 만들어준다. 무료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는 Biblothèque Sainte-Geneviève에서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를 할 수 있다. 무료 와이파이도 2시간 동안 제공되고 노트북도 사용 가능하며, 다양한 양서들이 즐비하여 도서관 내부에서 책을 열람할 수도 있다. 단, 대출은 되지 않는다. 내부가 헉 소리 날 정도로 굉장히 아름답고, 면학 분위기 최고다. 해가 진 후 도서관까지 가는 75번 버스를 타면 센 강의 야경,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라틴 지구의 야경도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지구가 바로 센 강 남쪽, 팡테옹 근처이다. 소르본 대학이 위치해 있고, 프랑스 위인들이 안치되어 있는 팡테옹(Panthéon)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마리 퀴리, 루소, 빅토르 위고, 볼테르 등 당대 최고의 혁명가, 철학자, 예술가들의 기운도 왠지 모르게 받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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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m 단거리 달리기인 줄 알았던 삶이 알고 보니 42.195km 장거리 마라톤이었고, 국소 최적화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연속적인 행복과 도전, 권태와 불안 사이를 오가며 버텨내는 과정이라는 걸 이곳에 와서야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유학 합격하면, 결혼하면, 직업을 구하면, 집을 사면, xx 하면 쨍한 날이 펼쳐지는 불연속 함수가 아니라 알고 보니 매 순간 희로애락이 비빔밥처럼 버무려져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게 살아내는 거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급증을 조금은 내려놓았어도 되는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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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 12월의 미래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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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흘렀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들어와서 가족들과 양질의 시간을 함께 했다. 1년 중 두 달을 온전히 한국에서 원격으로 일도 하면서 공간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일하며 한국에서 가족들과 지낼 수 있으니 참 좋다. 3년 전 이맘때는 몰랐었지. 그 시절이 내면의 강력한 모터가 되어 향후 3년간 인생이 다이내믹해지고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는 걸. 정신적으로 핀치에 몰렸던 2024년이었지만, 덕분에 이곳에서의 투지를 더 불태울 수 있었고, 자본주의에 더 눈을 떠서 곧바로 파리에 집도 사고 그 후 불어와 진입 장벽이 있는 기술도 끊임없이 꾸준히 습득하고 공유해서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3년 안에 (1) 내 몫의 빚을 현금 조기상환으로 다 갚고도 남아, (2) 내 명의의 스튜디오 또한 살 수 있었다.



축적된 시간은 웬만하면 배신하지 않았고, 매일같이 똑같은 거 하는 것 같았지만 6개월, 1년, 2년 단위로 계단식 성장이 이뤄져 있었다. 그냥 닥치고 최대한 많이 배우고, 시행착오 하고, 내게 소소한 행복들도 선물해 주며 장기적으로 씨앗을 뿌리고 실행해 나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단기적으로 이룰 수 있는 역량은 과대평가하지만, 장기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한다. 나는 이걸 그저 뒤집어버렸다. 가장 행복한 건 아기가 태어난 거다. 마치 2019년 말처럼 외부 상황이 흔들렸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취미로 다시 시작한 피아노와 스트릿 댄스, 그리고 수영은 어느덧 관록이 생겨 아마추어 콩쿠르 대회에서도 상을 받고, 크루에 들어가서 공연도 하고 유튜브도 찍고 있다. 수영을 꾸준히 한 덕분에 별도로 근력 운동을 하지 않아도 유산소 + 근력이 저절로 함께 되니 참 좋다. 수영장에서 평온하다. 사람이 적응의 동물인 게, 이제는 불어가 영어보다 조금 더 편해졌다. 테크니컬 한 그 어떠한 업무도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지언정 (항상 있다) 자신감 있게 즐기면서 한다.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버텨내야 했던 지난 세월의 마음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돌이켜보니 쓸데없는 경험이 하나 없었다. 2020년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해왔던 온라인 과외 부업이 재정적으로 불안정했던 시기에 일정한 수익을 가져다주었고, 그때 가르쳤던 많은 학생들이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하고 있다. 가르치고 각종 플랫폼에 꾸준히 글을 써왔던 게 힘이 되어 본업에서도 도움이 되고 있다. 지난 7년... 프랑스에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모든 과정 속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도 너무너무 기대된다. 앞으로 또 어떤 희로애락을 겪게 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어떤 일들을 벌일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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