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 대추 한 알로 요기(療飢)하는 양반(兩班)

설화의 재탄생

"그것 참...., 무슨 놈의 비가 이리도 잦은지...."


방 문을 열고 처마를 올려다 보니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째 내리는 비가 이날도 진종일 이어지고 있었다.


"봄비는 약비라고 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부인."

잠시 사이를 두다가 말을 잇는다.

"이 앞 샘골까지 물이 터져서 발이 묶인지 오래라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오. 부인이 고생이 많소"


해질녘이 되자 빗소리가 잦아 들었다. 낙숫물 듣는 소리가 퐁퐁.

골짝 아래로는 푸른 연기가 피어 오른다. 제비도 움츠렸던 날개를 활짝 폈다.


"내, 얼른 다녀 오리다."

빗줄기가 잦아들었으니 뭔가 요깃거리라도 찾아올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사부작, 산비알을 따라 웬 선비가 하나 내려오고 있었다.

근동에는 마을이 없는데 어쩐 일일까?

산을 다녀오려던 행장을 내려 놓고 선비를 맞이하러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건너는 인사에 선비가 반색을 했다.


"네, 안녕하신지요?"


영주에서 한양으로 오르던 길에 비를 만났다는 그 선비는 잠시 비를 피해 간다며 산으로 들어선 것이 잘못 같다고 했다.


"동기들이 그리 만류를 해도 제가 말을 듣지를 않았던 게 큰 잘못이지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내자가 부끄러움을 많이 탑니다." 문간에서 건네는 물 사발을 받아 들며 선비에게 권했다.


"물이라도 한 보시기 들고 계시지요."


"고맙습니다. 비를 맞았는데도 목이 컬컬합니다. 그려."


어느새 막역한 사이나 된 양, 말을 쉼없이 주고 받았다.


아마 올해도 과거 시험을 보러 많이들 올라가는 모양인지 길마다, 주막마다 과거시험 치르기에 앞서 시제(詩題)를 내고, 그에 맞게 풀이를 내어 보고, 가채를 해 보는 등 손들이 죄다 분주하다 했다.


'아, 벌써 몇 해런가.'


허한 마음이 들어, 본인도 냉수를 한 보시기 들이켰다.


"내자가 길이 늦는군요. 잠시만 바깥에 다녀 오겠습니다."


방문을 열고 바깥에 나가 보니, 아내는 정지간에 옹송거리고 있었다.


"아니, 부인. 여기서... 아니 일단 부엌으로 들어갑시다."


"아이, 이런 이리 몸이 차워서야."


그사이, 해가 저물어서였을까?

추워진 날씨 탓인지 꽁꽁 언 몸을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서방님..."


"그래, 부인이 고생이 많소."


"어디, 그래...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됐소?"


그때, 방에 홀로 앉아 있던 선비는 바깥에 나간 집주인이 들어오질 않자, 가만히 바람벽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없었는데 비록 촌이라 살림살이는 궁색하나 어디 하나 빠질 데 없이 깔끔한 것이 뭔가 곡절이 있는 터라, 별수없이 이곳에 사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집 주인과 안주인이 두런 두런거리는 걸 듣게 되었다.

그러부터 얼마쯤 되어서야 헛기침을 하며 집 주인이 들어왔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방에 들어온 집주인은 좀전의 옷을 벗고, 깨끗하게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오죽을 쪼개어 만든 참빗으로 상투를 새로 틀고 갓까지 쓰고 있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하는 선비의 물음에 대답 대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선비가 다시 보니, 부리(수구)에 나온 양손을 높이 들고 자못 진지하고 경건한 태도로 무얼 하나 받잡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빨갛게 잘 마른 대추였다.

더는 말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엄숙해서 선비는 집 주인이 하는 양, 그대로 볼 수밖에 없었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집 주인은 대추를 손에 높이 받자온 채로, 북쪽으로 허리를 굽혀 사배(四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소반을 가져다 선비에게 놓고는 아까의 대추를 접시에 올리며 한다는 말이,


"선비님, 객(客)에게 이리 홀대히 대접을 하는 것이 도리는 아니나, 지금 궁벽한 산골에서 대접할 것이 이것 하나밖에 없으니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는 것이었다.


"허허, 주인 양반도 참 겸양하시오. 내 비록 염치없이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으나 어찌 먹을 것을 바라겠소."


"그저, 비를 피하기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이리 방까지 내어 주시고 그렇지 않아도 너무 고맙소이다."


대꾸도 없이, 그저 미안해 하는 바깥양반에게 말을 이었다.


"내, 그것보다 아까 바깥에서 두 부부께서 무엇을 한참이나 의논하시다가, 별안간 의복을 정갈하게 입으신 연유와 대추 한 알을 이리 내어 오신 연유가 더욱 궁금합니다. 그 내력이나 들어보고 싶습니다."하며, 저만침이나 멀리 떨어져 앉은 안주인을 바라 보았다.

변죽 좋게 올려봐도 안주인은 표정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내력을 듣기 전까지는 이 대추 한 알을 먹을 순 없소이다."하며 집 주인을 다시 보니, 그제서야 대답을 했다.


"네, 저는 실은 영주 땅에 지내던 이 모(某)라는 사람이올시다"하며 꺼낸 말이 사실은 윗대로 꽤나 나라에 공을 세웠던 공신인데 나라 사정이 어찌저찌 하다 보니 예까지 피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모두 다 자신들을 떠났지만 지금의 아내만 자신에게 남아 그 마음이 갸륵하여 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찌하다 보니, 이런 산골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는 게 변변치 않아도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봄 장마가 길어지다 보니 그만 떼꺼리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비 그치는 틈을 타서 요깃거리라도 가지러 가던 차에, 선비님을 만나게 되어 아내에게 대신 쌀을 좀 꾸어 오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아내에게 쌀을 꾸어오라고 일렀는데 한참이 지나도 오질 않아 잠시 나가 보니, 아내는 하마 벌써부터 빈손으로 돌아와서 정지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공연히 저 때문에 곤욕을 치르셨군요."


"아닙니다. 쌀을 꾸러 간 곳에서 응당 쌀을 좀 내어줄 줄 알았는데 제 생각이 미천했던 모양입니다. 저 때문에 내자(內子)가 고생이지요."


"실은 쌀을 꾸러 간 곳은 제가 이곳에 왔을 때..."


얘기를 들어보니 이러했다.

자기네들도 참 빈한한 삶이었는데 이곳에 와 보니 상 양반이었던 모양인지 도망을 온 자기네들에게 뭐 하나라도 얻으려는 통에 하도 기가 막혀서 집 터를 하나 봐 주었다고 했다.


"집, 터요?"


"네, 집터를 제가 좀 볼 줄 압니다."


"그 집터라니....참 뜻밖입니다."


"네, 제가 하라는 공부에 열중하지 못하고 이러한 일도 익혔답니다."


"그렇군요. 네 하시던 말씀 계속 하시지요."


그러면서 말을 잇는 집 주인 얘기로는 그 땅이 터가 좋아서 누구든지 집을 짓고 들어 앉아 살게 되면 수 년 내에 천 석(石) 부자(富者)가 된다고 했다.

그 말에 영험했던 것일까, 그 터가 정말 운이 트이는 곳이었을까? 얼마되지 않아 지지로 궁상이던 그 사람네는정말로 천 석 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아니, 그런 곳을... 아니 그렇게 부자가 되었는데 박대하더란 말씀입니까?"


"주인 양반도 참... 어쩌자고, 그런 좋은 곳을 그런 사람에게 양보를 했답니까?"

짐짓, 화를 내는 시늉을 했더니, 여지껏 조용하던 집 주인이 껄껄 웃었다.


"이상하지요? 허허. 그런데 말입니다. 그곳은 천석의 부자가 되는 터(基)입니다만 이곳은 터를 잡기만 하면 수 년 내에 왕(王)이 다녀가실 자리입니다."


"어어, 왕이라니, 주상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것 참 신기한 일이로군요."


"그럼, 하나 더 묻겠습니다. 아까 대추 한 알을 양손으로 받들어 북녘을 향해 사배하던 것은 어찌된 영문입니까?"


수염을 가볍게 쓸어 내린 주인이 남은 얘기를 했다.

이 터에 자리를 잡고, 기제를 지내기 위해 대추나무를 심었는데 십 년 만에 꽃이 피더니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마 씨앗을 심은 듯했다. 그 첫 열매를 잘 따두었다가 한양에 올라가는 일이 생기면 그때 임금께 진상을 하려던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반가운 손님이 오신 고로, 임금이 계신 궁궐을 향해 사배를 하고 마음속으로만 드린 뒤에, 선비께 드리기로 한 거였다.


"거참, 이야기가 들을수록 참 재미가 납니다. 귀한 대추이니 내가 이걸 혼자 먹기는 뭣하고 기념으로 잘 간직하겠소이다. 또 얘기를 많이 들으니 먹지 않아도 먹은 듯 속도 든든하구요."


그러고는 시간이 어느새 밤이 깊어 잠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내내 권하는데도 바깥 주인은 마당 한 켠 나무 장작이 있는 곳에 등을 빌리우고, 안주인은 정지간 안에 앉은 채로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뜨끈한 방 안에서 선비 홀로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튿날, 잠자리가 좋았던 덕분에 가뿐하게 일어난 선비가 문을 열고 나오니 마당이 깨끗하게 쓸리어 있었고 툇마루엔 새로 떠다 둔 샘물이 한 보시기 있었다.

물을 시원하게 들이킨 선비가 인사를 했다.


"내, 잠자리가 아주 좋았던 덕분에 간만에 깊은 잠을 잘 잤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내내 건강들 하시고 좋은 일 있으시길 빕니다." 인사를 건네며 어제의 그 오솔길로 올라갔다.


"예, 조심히 올라가시고... 첫번째 개울에서 우측으로 크게 돌아 내려가시다 보면 마을이 나올 겁니다. 거기부터는 쉽습니다."


손을 흔드는 선비를 보며 크게 일러 주었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능성이를 넘는 선비를 보며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부엌으로 들어서는데 저만치 다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어르신~"


"네~ 네~ 무엇이라도 두고 가셨는지요?"


"아닙니다. 모월 모시에 한양에서 시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꼭 한번 다시 올라 오십시오. 그때엔 제가 뫼시겠습니다."


알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선비는 능성이를 도로 넘었다.


그런 뒤로, 시간이 퍽 흘러 날이 훈훈해질 무렵, 문득 한양으로 가마 했던 약속이 생각나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부인~ 내, 다녀오리다."


몇 날, 며칠을 걸어 당도한 한양에는 그때 선비의 말대로 '별과'가 있었다.

시제는 '대추'

그제서야 주인은 그때의 그 선비와, 그때의 연에 대해서 무언가 퍼뜩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설화'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실은 외할머니 품에 폭 안겨서 듣던 호랑이 담배 먹던 얘기(외할머니는 호랑이 담배 태우던 얘기를 종종 하셨다)나, 큰댁 할아버지께서 들려 주시던 나뭇꾼과 횃불 이야기며 거창에 사시는 외숙모가 들려 주시던 호랑이 새끼를 냉큼 주워왔다가 큰 홍역을 치르고 난 뒤에, 흰 죽을 한 말 가옷 쑤어다가 호랑이 새끼와 함께 원래 있던 둥저리에 가져다 두었던 이야기며 금을 캐던 금광에서는 귀신이 살 수 없다던 당숙 아주머니 이야기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설화라는 생각이었다.

듣자 하니, <그리스 로마 신화(만화)>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팔리고,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가 어린이들에게 더할 수 없는 재미와 마력을 선사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그만큼이나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이 많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전래동화 선집은 소위,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닌가 싶었다. 해서, 생각한 게 이러한 나라도 수없이 많은 설화를 모티프로 각색을 해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노력을 하다 보면 언젠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이 손 위에 들고 보는 책이 되어 누구나 읽어 보고픈 베스트셀러나 되지나 않을까 하는 다소 허황된 판타지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