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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pr 30. 2019

그럭저럭 괜찮은 거 말고

똑같은 안경을 10년째 쓰고 있다. 작고 동그란 안경. 올해 초등학생인 된 딸은 내가 다른 안경을 쓴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빠를 그릴 때는 항상 동그란 안경과 함께 그린다. 이미 내 얼굴의 일부로 인식할 것이다. 나도 이제 다른 안경은 어색하다. 해마다 안경알을 바꾸며 ‘이번에는 안경테도 한번 바꿔볼까…’하며 쓰윽 둘러보지만, 썩 마음에 드는 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 안경은 원래 아내가 쓰던 것이다. 집에서만 안경을 끼는 아내에게 내가 골라줬다. 나름 안경을 보는 안목이 있다고 자부하는데 유독 아내 것은 고르기가 쉽지 않다. 아내는 평소에 콘택트렌즈를 끼는데, 안경을 쓰면 인상이 많이 달라진다. 딸애 어린이집을 보낸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느 날 안경을 벗고 가니 보육교사가 이러셨단다. ‘어머, 오늘은 이모가 대신 오셨나 봐요!’ 평소와 다르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해서 더 그랬겠지만, 안경을 쓰고 안 쓰고의 차이가 참 크다. 왜 드라마를 보면 안경을 쓴 여주인공이 안경을 벗으면 주변이 환해지고 남자 주인공이 반하지 않나? 그 정도 느낌이다.


아내가 1년 정도 쓴 안경을 (아무리 써도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다른 안경으로 다시 골라주고, 내가 받아서 썼다. 메이드 인 재팬이라고 쓰여있는 고급 안경이다. 그전까지는 매번 세일 표시가 있는 학생용 안경을 고르다가 처음으로 써보는 비싼 테였다.


막 동그란 안경의 유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내게 동그란 안경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건축가의 상징. 유독 건축가 중에는 동그란 안경을 쓴 사람이 많다. 모더니즘의 아버지 르 꼬르뷔지에부터 활발히 활동 중인 승효상 건축가, 그리고 대학 시절 어느 교수님까지. 그런 분들을 꼭 따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왠지 동그란 안경이 궁극의 안경이라 여겨졌다. 스티브 잡스가 검정 터틀넥을 궁극-물론 그가 이 단어를 떠올리지는 않았겠지만-의 옷으로 여겼던 것처럼. 아, 그러고 보니 잡스의 안경도 둥글군요. 뭐, 내가 유행 때문에 동그란 안경을 쓴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게다가 내 안경은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알이 크지도 않고, 자세히 보면 완전히 둥글거나 타원형이 아닌 약간 역삼각형 형태다. 왜 이렇게 구구절절 얘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마음에 드는 안경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같은 안경을 계속 쓰는 게 약간 지겹기도 하고, 새 안경으로 분위기를 조금 바꾸고 싶기도 하다. 문제는, 마음에 드는 안경은 죄다 비싸다는 것이다. 흔히들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가는 건 쉽지 않다고 한다. 차도 마찬가지다. 큰 차를 타다가 작은 차를 타는 건 힘들다고. 이 말속에서의 크고 작음은 물리적인 크기도 있겠지만, 가격이나 가치의 크기를 뜻하기도 할 것이다. 국산 대형 SUV를 타다가, 수입 중형 세단으로 얼마든지 갈아타기도 하니까. 내가 가진 물건이란 게 그렇게 고급이거나 비싼 게 없어 내게 이 말을 적용할 일은 많지 않다. 하나 있다면 아이폰 정도? 스티브 잡스나 애플의 대단한 팬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삼성이나 안드로이드가 싫어서도 아니고. 매번 새 아이폰의 가격이 공개될 때마다 이번에야 말로 다른 저렴한 폰으로 갈아타야지 하면서도, 결국 새 휴대폰에 적응하기 귀찮다는 핑계로 최신형 아이폰을 사게 되는 것이다.


그다음이 이 안경이다. 한번 고급 테를 써보니, 저렴한 안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언뜻 보면 다 비슷하지만, 내 눈에는 다 다르다. 굳이 디테일까지 눈여겨볼 필요도 없다. 지금 내 안경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자세히 봐야 보이는 우아한 자개 무늬가 있으며, 안경다리가 연결되는 부분에 내가 좋아하는 톱니 모양의 패턴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냥 첫눈에 느껴진다.


생각해 보니 아이팟이나 아이폰을 봤을 때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다른 물건과는 달랐다. 광고 속 이미지로만 보던 형형색색의 아이팟을 직접 봤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어, 이미지랑 진짜 똑같이 생겼잖아?’ 브라운 아이즈 나얼의 목소리가 보정하지 않은 진짜 목소리란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이랄까. 아이폰도 그랬다. 배터리 일체형만이 만들 수 있는 깔끔함이라니. 물론 세대가 지날수록 놀라움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외관과 디테일의 완성도는 다른 전화기가 따라오기 힘들다. 그리고 나같이 휴대폰으로 카톡이나 보고 날씨나 확인하는 게 전부인 사람까지 냉장고 한 대 값인 이 작은 기계를 사게 한다.

실제로 봐야 더 예쁘다.


얼마 전, 아이폰을 바꿨다. 최신 기종으로 바꾼 건 아니고, 아내가 쓰던 구형 폰이다. 이렇게 말하니 나는 안경도 아내가 쓰던 거, 핸드폰도 아내가 쓰던 걸 받아서 쓰는 불쌍한 남편이 된 기분이지만, 내가 그러자 해서 그런 거니 상관없다. 그때 휴대폰 액정이 깨진 채로 몇 개월을 쓰고 있었다. 액정을 교체하느니 이 참에 바꾸자 마음먹었는데, 막상 새로 사려니 가격도 너무 비싸고, 쓰던 폰도 액정 깨진 것 말고는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마침 아내가 일 때문에 고성능 카메라가 달린 핸드폰이 필요했고, 나는 그대로 아내가 쓰던 폰을 받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받는 게 가장 속 편하다. 돈도 들지 않고, 자원을 낭비한다는 죄책감도 없다. 그리고 새로운 물건(중고지만)이 생겨 기분 전환도 된다.


이번에도 아내의 안경을 받아 써볼까? 호피 무늬의 뿔테 안경이다. 빛에 따라 호피 무늬는 보이기도 하고 잘 안보이기도 한다. 이런 게 좋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거. 한번 써보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받기 싫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걸로 바꾸기에는 지난 10년이 너무 억울하다. 이번에는 자원 낭비니, 돈 낭비니 같은 말은 생각하기 싫다. 다시 말하지만, 난 안경을 보는 눈이 높다. 아내도 안경이나 선글라스를 살 때는 꼭 내 의견을 묻는다는 말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건 싫다. 값비싼 수입차를 타자는 것도 아니고, 이제 안경 정도는 내 맘에 꼬옥 드는 걸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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