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이현 Apr 25. 2019

책장을 비우고 알게 된 한 가지



읽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 중 하나다. 영화나 드라마도 좋지만 그건 왠지 맘먹고 한자리에서 끝까지 봐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그럴 시간을 내기가 통 힘들다. 왜 나만 그런 시간을 내는 게 이렇게 힘든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렇다.


반면에 읽는 일은 틈틈이 하기에 좋다. 그렇다고 많이 읽는 건 아니다. 근 몇 년간 책은 전혀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많이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같은 회사의 동료는 화장실에 서서 소변을 볼 때도 스마트폰 화면을 본다. 대부분 부동산이나 주식 관련 기사일 것이다. 아니면 항공권 정보이거나. 지금은 퇴사한 같은 팀 선배는 스스로를 ‘활자 중독’이라 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전철역 입구에서 받은 무가지라도 읽었다고. 나는 그들만큼은 아니다. 읽는 것뿐 아니라, 뭐든 한 가지 일에 몰입하거나 중독 상태에 가까워져 본 적은 없다. 게다가 컴퓨터든 핸드폰이든 화면을 오래 바라보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내 게으르고 재미없는 일상에서 무언가를 읽는다는 건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이자 삶의 의미를 짜낼 수 있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출근을 한다. 신호가 온다(장이 안 좋다). 화장실에 가서 스마트폰의 ‘읽을거’ 폴더에 들어가 좋아하는 언론사의 기사나 영화, 책 관련 칼럼을 읽는다. 가끔 재기 발랄한 글을 보면 숨죽여 킥킥대기도 한다. 퇴근을 한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워 적당히 딸과 놀아주는 척을 한다(주로 묵찌빠. 누워서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다 딸이 잠깐잠깐 혼자서 놀면 나도 옆에 있던 책을 문득문득 펼친다. 스마트폰은 가능한 보지 않는다. 나도 딸에게 못 보게 하니까 나도 안 봐야 공평하다.


모든 일에 그리 열성적이지 않은 나는, 무언가를 모으는 일에도 크게 관심이 없다. 학생 때 테이프나 씨디를 조금 사모았지만, 음악을 듣기 위함이었지 컬렉션을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다. 사실 책은 학업을 모두 마친 후 오히려 열심히 읽었다. 회사에 들어가니 학생 때와는 비교가 안될 엄청난 회의감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표를 던질 배짱도 없었다. 책 속에 길이 있을까, 퇴근을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회사 건물의 지하에는 대형 서점이 있다. 점심시간도 그곳에서 보냈다. 서점에서 공짜로 읽는 책도 있었고, 인터넷으로 주문해 집에서 읽는 책도 있었다. 한동안 그 인터넷 서점의 골드 회원 자격을 유지했다. (플래티넘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집 안에 책이 한 권 두 권 쌓이기 시작했다. 역시 꼭 모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읽기 위해 사는 것이었지, 모으기 위해 사는 건 아니었으므로. 가능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고, 내가 읽으려는 책이 도서관 책장에서 항상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 대신 엑셀표를 하나 만들었다. 내가 읽은 책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산 책이든 서점에서 읽은 책이든 모두 기록할 수 있으니 나만의 서재는 이 엑셀 시트가 될 거라 생각했다. 제목, 저자, 역자, 출판사, 출판일 등의 칸을 만들어 기록했다. 나만의 분류코드도 만들어 책마다 분류코드도 지정했다. 딸이 태어나자 책 읽을 시간도 없어져 이마저도 그만두었지만, 그 당시에는 진지했다.


아르헨티나의 문호 보르헤스가 쓴 ‘바벨의 도서관’ 첫 문장은 이렇다. “우주-다른 사람들은 ‘도서관’이라 부르는-는 무한한 육각형 방으로 이뤄져 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몰라도 왠지 이 엑셀표가 내 바벨 도서관이 된 기분이었다. 무한한 엑셀의 칸으로 이루어진 나만의 우주라니! 지금 다시 그 엑셀 파일을 열어보니, 그게 다 무슨 의미였나 싶다.

의미 없다...


결혼을 하고 전셋집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책을 처분했다. 가족이 한 명 늘어나니 공간이 항상 부족했다. 책장보다 잡동사니를 보관할 수납장이 필요했다. 차 트렁크에 가득 책을 싣고 -슬프지만 보르헤스의 단편도 포함해서- 중고 서점에 가니 상당한 현금으로 바꿔주었다. 내가 판 책의 목록이 있는 두툼한 영수증도 함께 받았는데 왠지 버리기 아까워 돌돌 고무줄에 말아 책장 한쪽에 보관했다. 가장 최근 이삿짐을 정리할 때는 그마저도 버렸는데, 영수증의 활자는 희미해져 갔고, 해당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가 팔아넘긴 책의 내역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수증을 버리면서 책장의 꼭 두 칸 분량의 책만 빼고 모두 내다 팔았다. 남은 책은 좋아하는 단편소설집이나 에세이집인데, 대부분 여행 이야기나 이방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영국 런던의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줌파 라히리’. 빠질 수 없는 하루키 씨 책도 ‘먼 북소리’ 정도만. 간혹 건축 관련 책도 있지만, 대부분은 중고 서점에서 매입해주지 않아 구출된 경우다. 사실 이민을 꿈꾸고 있어 좀 더 쉬운 마음으로 책을 정리했고, 남긴 책 몇 권도 내가 타국의 이방인으로 살아야 할 때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들이었다.


이제 따뜻한 나라에 정착하는 꿈(좋은 꿈일지 나쁜 꿈일지는 모르겠으나)은 반쯤 포기하고, 글쓰기를 시작하니 새삼 팔아넘긴 책들을 다시 보고 싶다. 왠지 인용하고 싶은 문구도 많았던 것 같고, 다시 한번 펼쳐보면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아쉬운 대로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꺼내어 다시 읽어보니, 다시 재미있다. 이미 본 책이니까 더 부담 없이, 딸과 묵찌빠를 하다가 잠깐잠깐 읽기도 쉽다. 책장에 너무 많은 책이 있었다면 이렇게 다시 꺼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지금 남아있는 책들이 진짜 내 책이다. 일부러 남겼든 중고서점에서 받아주지 않았든, 이게 내 전부다. 엑셀표에 정리되어 있는 혹은 인터넷 서점의 구매 목록과 판매 목록에 있는 수백 권의 책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될 책들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겠지. 애초에 팔지 않았다면 돈은 조금 절약했겠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느 게 진짜 내 책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핸드폰의 주소록이 모조리 지워졌을 때 진짜 연락할 사람들의 연락처만 남는 것처럼, 진짜 다시 볼 책만 남은 것이다.


나도 조금 변했다.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 글귀를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내가 찾는 글귀라는 것도 대부분 유명한 글귀들인지라 인터넷 검색 두세 번이면 대부분 찾을 수 있다. 하루키 아저씨가 양배추 샐러드에 대해 썼는데 뭐였지…? 하고 쓰윽 검색해 보는 것이다. 아마 내 책장을 뒤져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찾는 것보다는 수십 배 빠를 것이다. 찾아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그만이다. 누군가 쓴 글-그게 하루키가 아니라 하루키 할아버지라 하더라도-을 다시 찾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새로이 생각하고 내 눈 앞에 있는 글을, 또 책을 읽는 게 낫다.


이제 다시 새로운 책이 한 권 한 권 쌓일 것이다. 가끔은 서점에서 보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책도 있겠지. 그래도 엑셀표를 다시 정리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읽은 책, 읽은 글은 또 대부분 잊히겠지만 상관없다. 읽고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니까.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하고, 킥킥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아내에게 읽어주기도 했으니까. 그 어여쁜 글들로 이미 나는 새로워졌으니까.

이전 14화 술은 좋지만 회식은 싫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