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상황이건 첫 만남의 자리에서 술에 관해 물어보면 흔히 듣는 대답이다.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남녀가, 회사에서 상사가, 비즈니스 미팅에서 처음 만나는 상대방이, ‘술은 잘하세요?’라고 물으면 저렇게 대답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대략 이런 뜻일 게다. ‘나는 술자리를 즐길 만큼 충분히 사회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밝은 사람이지만, 술은 많이 주지 마세요.’ 특히 신입사원이 ‘네, 술 좋아합니다’ 혹은 ‘술 잘 마십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날 밤 맨 정신으로 집에 가기는 틀렸다고 봐도 좋다.
나는 그 반대의 사람이다. 술은 좋아하지만 술자리는 안 좋아한다. 가족들과 혹은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가볍게 한잔 마시는 건 좋아한다. 아내와 딸이 잠들었을 때 혼자서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가끔 집이 비면 보고 싶던 영화를 틀어놓고 마시는 맥주도 좋다. 하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때로는 오늘 회의에서 처음 본 사람과 마시는 술은 질색이다. 할 말도 별로 없을뿐더러 어색하게 술을 권하는 것도 고역이다.
십여 년 전 회사에 입사해 가장 힘들었던 건 회식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워낙에 낯을 가리고 남들과 친해지지 못하는 성격이라 함께 들어온 동기들과도 데면데면했다. 내가 입사했을 때 우리 회사는 한참 성장하는 시기였고 일주일에 두세 번 회식이 있었다. 팀 회식, 본부 회식, 프로젝트 회식, 접대하는 회식, 접대받는 회식. 종류도 다양했다. 술 좋아한다고 소문난 팀장은 ‘막내’라면 모든 회식에 참석해 ‘고참’들에게 술도 따라드리고 본인을 어필하라고 했다. 팀장님이 주관하는 팀 회식에서는 1차, 2차, 3차, 때로는 4차까지 아무도 집에 갈 수 없었다.
‘술잔을 돌린다’라는 게 정말로 자기가 쓰던 술잔을 돌려서 같이 먹는 의미인지 그때 알았다. 막내는 자기 술잔을 가지도 고참 옆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렇게 하면 다들 편하게 앉으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편하게 앉았다면 다음 날 안 좋은 소문이 돌겠지. 팀장님은 아직 대학생 티를 벗지 못한 막내가 빨리 회사 분위기에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렇게 말했겠지만, 나는 회식을 마치고 혼자 전철을 기다릴 때마다 퇴사를 생각했다. 옆 팀 동기는 이 자리 저 자리 돌아다니며 어느새 대리들과는 형 동생을 하고 옆 팀 부장님들과도 부쩍 친해졌지만, 나는 단언컨대 아무도 없었다. 술자리에서 친해진 사람은.
이서방은 술을 잘 배웠어.
장인어른이 간혹 하시는 말씀이다. 저녁을 먹을 때 내가 맥주나 소주를 한두 잔만 마시고 멈추는 걸 보고 그러신다. 그럴 때마다 그냥 ‘네…’하고 얼버무리지만, 사실은 ‘누구한테 술을 배워본 적은 없습니다.’라고 하고 싶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건 맞다. 일 년에 한두 번 만취상태로 집에 오기도 하지만, 인사불성이 되거나 필름이 끊긴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정도 마시면 몸에서 술을 받지 않는 체질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한두 잔만 마시는 게 좋다. 가끔 아내와 와인을 따서 한 병을 다 마시기도 하고,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마시고 취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천천히, 적당히 마신다. 내 페이스대로. 그렇게 내 뜻대로 마실 수 없다는 게 내가 회식 자리가 불편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술자리 예절. 가끔 혀가 반쯤 돌아간 부장님이 ‘주도’라는 무협지에 나오는 권법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한다. 주도 운운하는 사람 치고 혀가 꼬부라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술은 왜 오른손으로 따라야 하고 오른손으로 받아야 하는지, 자기 술은 그냥 자기가 따라 마시면 안 되는 건지, 따져 물을 수는 없다. 그게 주도니까.
술을 딱히 배운 적은 없다. 대학에 가기 전에 아버지나 친척들이 가끔씩 맥주나 소주를 한잔씩 따라주긴 했지만, 한 모금 맛보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가 특별히 술자리 예절을 언급한 적도 없다. 그저 남들을 따라 어른 앞에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시기는 했다(그런데 왜 이렇게 하는 거지?). 아버지도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예절은 상관없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게다가 술이란 게 꼭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는 일인가? 친구들과 마실 때는 서로 술을 따라 주기도 하지만, 그냥 내 잔이 비면 알아서 따라 마시기도 한다. 상대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친구 집에 가면 그냥 귀찮으니까 큰 잔에 따라 알아서 조금씩 마시기도 한다. 많이 마시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해도 된다.
이런 분위기라면 언제나 환영
취업을 하고 결혼 전까지 같이 살던 친구가 있다. 회식을 마치고 우울하게 집에 돌아온 어느 날 그 친구가 (맥주캔을 건네며) 말했다. 네 캐릭터를 만들라고. 사람들이 좋아하던 싫어하던, 일관적으로 행동하면 본인의 캐릭터가 된다고. 그렇게 그 캐릭터대로 살면 된다고. 그때부터 내 캐릭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팀장이 뭐라 하든 적당히 눈치를 봐서 3차까지 끌려다니지 않는다. (2차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모르는 사람이 가득한 회식은 어떠한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혹은 아무런 핑계 없이도 참석하지 않는다. 맥주든 소주든 내가 스스로 따라 마셔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하면 술을 더 달라는 신호 같으니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술잔은 오른손으로 든다. 예의 없어 보이기는 싫으니까.
그렇게 나는 직장에서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건 사실, 술이 아니라 술자리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