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3
저는 가이드 투어 별로 안 좋아해요.
같은 팀에서 친하게 지내는 Y과장이 여행 이야기만 나오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미술관 같은 건 더욱이 관심이 없어 파리에 갔을 때도 루브르 박물관은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고. ‘그냥 카페에 앉아서 얘기하고, 사람들 구경하는 게 좋아요.’, ‘파리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센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탔던 거예요.’ 그 뒤로 항상 따라붙는 말이다.
나 역시 가이드 투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여행도 할지 모르는 촌놈들이나 하는 것 정도로 치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짧은 여행 일정에서, 더구나 준비할 시간도 많지 않아 사전 지식이 전무할 때 현지 가이드 투어는 사실 상당히 괜찮은 선택지이다.
리스본 여행이 그랬다. 급하게 일정을 잡고(비행기표와 호텔 예약은 떠나기 일주일 전에 했다), 남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리스본의 구체적인 여행 계획은 아무도 짜지 않았다. 이번 여행 계획을 총괄한 S과장조차 하루는 알파마 지구, 하루는 리스본 근교, 마지막 날은 벨렘 지구 정도의 밑그림만 가진 상태였다. 떠나기 이틀 전, 네 명이 모인 카톡방에 P차장이 링크 창을 하나 띄웠다. 현지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이었다.
그래, 첫날은 가이드 투어 하자. 모두 찬성이었다. 점심 무렵 도착하는 우리에게 안성맞춤으로 오후 3시에 시작되는 알파마Alfama 지구의 투어가 있었다.
가이드와 만나는 장소는 호시우 광장. 까맣게 그을린 가이드는 광장 이름의 역사적 유래를 설명하며 투어를 시작했다. 동 페드루 4세Dom Pedro IV는 1807년 나폴레옹이 침입했을 때 아버지 주앙 6세를 따라 식민지인 브라질로 망명, 아니 도망을 갔다가, 나폴레옹의 몰락 후에도 포르투갈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브라질을 독립시켜 스스로 브라질의 왕, 동 페드루 1세가 된 인물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다. 그래서 왕의 이름 대신 '공동의 광장', 호시우Rossi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가이드 투어가 백 퍼센트 내켰던 건 아니었다. 여전히 마음 한쪽은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걸어 다니다가, 괜찮아 보이는 야외 테이블을 발견하면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맥주나 홀짝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학창 시절에 누군가에게 설명을 듣는 일은 교실 안 수업의 연장선으로 느껴져 거부감이 일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직장생활 12년 차에 업무와 관련 없는 현장 학습은 퍽이나 즐거웠다. 한가롭게 맥주나 마시고 싶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질 만큼. 게다가, 포르투갈의 맥주는 조금 생각 밖이었다. 투어를 시작하기 전 점심 식사 때, 첫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다. ‘이건 좀 한국 맥주 같은데.’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 독실한 크리스천, P차장의 말이었다. 사그레스Sagres라는 맥주였다.
‘무어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모라리아Mouraria 지구를 걸으며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되었다. 리스본의 주요 관광지가 모여 있는 알파마 지구의 북쪽 지역은 엄밀히 말하면 모라리아 지구다. ‘파두Fado’의 동네. 바꾸어 말하면, ‘사우다드Saudade’가 서려있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사우다드는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기 힘든 포르투갈인 특유의 애환의 정서를 표현하는 말이다. 또한 운명(Fate)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파두는 이 사우다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서 슬슬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해야 할 것 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리스본에서 가장 서민적인 동네임에는 틀림없다. 서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동네답게 길은 얼기설기 엮여 있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지는 동네다. 가이드는 잠깐 쉬어가자며 골목 귀퉁이에 위치한 음식점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맥주를 주문하니 이 지역의 또 다른 맥주, 슈퍼복Superbock이 나왔다. 점심에 마셨던 사그레스와 별다를 것 없이 특색 없는 맛이다.
밍밍한 맥주-맛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기는 하지만-를 마시고 다시 걸었다. 그리고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모라리아 동네의 파두 벽화를 배경으로, 오렌지빛 지붕과 테주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포르타스 두 솔 광장Largo das Portas Do Sol에서, 유명한 노란색 트램이 지나가는 리스본 대성당Sé de Lisboa 앞에서. 유명한 관광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일은 마흔이 다 되도록 늘 어색하다. 하지만 나와 일행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 그깟 어색함 정도는 이제 참을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느라 지친 핸드폰 배터리가 경고 신호를 보낼 때 즈음, 테주강과 접한 코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 at Lisbon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일정은 끝이 났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아직 대낮같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틀 후 벨렘Belém 지구를 구경하는 또 다른 투어를 예약했다.
아무래도 남자 넷이서 '저 성당은 이름이 뭐지?’ 하며 멀뚱 거리는 것보다는,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손가락으로 브이자도 만들며 재잘재잘 단체사진도 찍는 게 훨씬 덜 어색하니까.
표지 사진 : 산타루치아 전망대(Miradouro de Santa Luzia)의 부겐빌레아_ⓒ이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