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4
‘드르륵’.
리스본의 첫날 잠자리에 들기 전, 보다폰 유심으로 갈아 끼운 핸드폰에 이메일 알람이 울렸다. 알람이 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카톡을 포함한 문자 메시지의 알람도 꺼짐으로 설정한다. 알람이 울렸다는 것은 즉, 내가 VIP로 지정한 사람, 이민 에이전트의 메일이라는 것이다. 호주의 정책이 점점 까다로워져 이민은 이제 거의 포기한 상태이지만, 에이전트와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케이스가 생겼으니 급하게 서류를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지원자가 몰릴 것으로 예상돼 언제 클로즈될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추천서와 최신 이력서는 부서장의 날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낼 수 없었고, 여권과 같은 간단한 서류를 아내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여행 중에는 가능한 여행에만 집중하려고 하지만, 너무나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다음 날 태양광 발전소를 견학 가는 차 안에서 나는 핸드폰을 보며 추가로 요청하는 서류를 확인하고, 아내에게 연락하고, 첨부파일을 포함한 이메일을 보냈다.
견학을 마치고, 타마리스Tamariz 해변으로 향했다. 다시 리스본 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4월25일 다리Ponte 25 de Abril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의 생김새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거의 흡사하다. 외형보다 중요한 건 다리의 이름, 4월25일이다. 이 다리의 원래 이름은 독재자 '살라자'다리였다. 하지만 1974년 4월 25일의 포르투갈 혁명 이후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날의 혁명을 통해 포르투갈에는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타마리스 해변은 에스토릴Estoril 기차역과 한걸음 거리였다. 기차 타는 걸 좋아하는 딸과 함께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조금 깊어 보이는 곳은 물가에서 50미터쯤 되는 곳에 사다리가 달린 콘크리트 구조물이 설치돼 있었다. 안전하게 바다 수영을 즐기라는 의미다. 어지간한 한국인들-1.2미터 깊이의 수영장에서 수영 선수들이나 할 법한 영법을 배우는-은 시도하기 힘든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유롭게 수영을 익히고, 항상 물을 가까이해야만 갈 수 있는 곳. 5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내게는 영영 도달하기 힘든 곳.
수영을 좋아하는 딸은 커서 저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바닷속에 첨벙하고 대담하게 뛰어들 수 있을까.
첨벙 뛰어드는 대신,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7월 초의 대서양은 몹시 차가웠다. 감히 몸 전체를 담글 엄두는 나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발을 말리고, 모래를 털며 일어섰다. 기념품 가게에 들러 해변에서 현지인들이 많이 가지고 놀던 커다란 탁구채 같은 걸 샀다. 앞으로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 가방에 항상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해변 도로를 따라 다시 차를 움직였다. 유럽 대륙,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 호카 곶Cabo da Roca에 도착했다.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좀 바보스러운 일로 여기는 편이지만, 이 곳에서의 감회는 남 달랐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여기부터는 바다.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는 어쩌면 허무한 감정. 대서양의 끝은 절벽이라고 생각하던 시절, 포르투갈 사람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포르투갈 사람과 내가 인식하는 세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시아의 극동 지역에 사는 내게 바다란 곧 태평양이다. 동으로 동으로 배를 타면 아메리카의 서쪽 해안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곳은 정반대다. 이 곳에서 바다는 대서양이다. 배를 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면 아메리카 대륙의 동쪽에 닿는다.
세상을 보는 방향이 수도꼭지를 돌리는 것처럼 뒤집어진다.
세상의 반대편 끝을 뒤로한 채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신트라 궁전Palácio Nacional de Sintra이다. 고딕과 르네상스, 무데하르, 마누엘 양식이 혼재된 건물이다. 특히 마누엘은 포르투갈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바다와 배의 상징물, 예를 들어 산호와 조개, 밧줄과 닻 등의 형태가 건물 곳곳에 조각된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성당이든, 미술관이든 오래된 건축물의 내부를 구경하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한다. 건축을 전공했고 현대 건축이나 사람이 사는 공간은 좋아하지만, 무슨무슨 양식이니 하는 것들에는 통 관심이 가지 않는다. 신트라 궁전을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굳이 들어가야 할까. 관람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는데, 그냥 이 마을을 산책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난 안 들어 갈게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성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곳은 주로 왕실 가족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뱅글뱅글 좁은 돌음계단을 오르며, 아직 주방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팬과 냄비를 바라보며, 유리로 세공된 화려한 샹들리에를 바라보니 그 시절, 이 장소에 있던 사람들이 소환됐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포르투 와인에 잔뜩 취하며 연회를 벌이고, 함께 온 다른 가족의 청춘남녀는 사랑에 빠져 어둑한 계단에서 몰래 입맞춤을 하고, 가끔은 재산 문제나 결혼 문제로 시끄럽게 다투기도 한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생각할 때 건축양식 따위는 사실, 거의 비중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행 중에는 지금, 이 곳에만 충실할 것. 하지만 자꾸 한국에 두고 온 딸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애의 작은 손을 잡고 이 여름 별장의 이야기를 함께 상상한다면 (물론 어서 호텔로 돌아가 수영이나 하자고 아우성이었겠지만)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 에스토릴에서 호카 곶으로 가지 전에, 리베리아Rebeira라는 또 다른 해변에 주차를 하고 30분 정도를 둘러봤다. 카스카이스Cascais라는 리스본 근교의 유명한 휴양지의 해변이다. 모래사장에서는 똑같은 초록 모자를 쓴 남자와 여자아이들이 미니 축구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학교에서 해변에 놀러 가는 일도 드물뿐더러, 가더라도 남자와 여자아이들이 섞여 축구를 할 일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 때문이다, 이민을 가고 싶은 건. 딸에게 좀 더 자유로운 세상을 선물하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편을 가르고, 남자아이들이 운동장을 온통 차지하고 축구를 할 때, 여자 아이들은 운동장 한쪽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세상 말고.
‘우리,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어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왠지 내가 먼저 제안했다. 딸이 있었다면 아마 이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했을 것이다.
딸아이 대신 씩씩하게 혀를 내밀어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표지 사진 : 모라리아(Mouraria) 지구의 벽화 (난민 유입을 막는 유럽을 비판하는 내용)_ⓒ이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