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6
저녁 8시 30분, 우리는 카몽이스 광장에서 가이드와 재회했다. 광장의 주인공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Luís de Camões는 무어인들과의 전투에서 오른 눈을 잃어 방황하다 한 청년을 칼로 찔러 감옥에 가게 됐다. 어머니의 간곡한 청원으로 1년 뒤 석방된 그는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라는 애국적 대서사시를 완성하고 포르투갈의 민족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야간 투어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팀도 섞여있었다. 수신기를 받아 사원증처럼 목에 걸고 왼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말주변이 좋고 잡다한 지식이 많은 가이드의 말은 끊기는 법이 없었다. 라디오에서 무음이 3초 이상 계속되면 방송사고로 간주한다는데, 방송사고를 낼 걱정이 없는 베테랑 디제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지난 3일간의 빡빡한 일정으로 상당히 지쳐있던 터였다. 야간 투어를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가이드의 목소리를 따라나섰다. 1905년에 열린 리스본 최초의 카페 ‘아 브라질레이라Café A Brasileira’에서 에스프레소를 한잔씩 들이키고, 그 앞에 있는 페소아의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투어는 시작됐다.
가이드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남자라며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를 소개했다. 적어도 75개 이상의 이명으로 글을 썼으며, 아직도 어마어마한 미완성 원고의 정리 작업이 진행 중인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가이드는 그의 글귀 한 구절을 낭독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매 순간 변해왔다.
끊임없이 나 자신이 낯설다.
나를 본 적도 찾은 적도 없다.
그렇게 많이 존재해서, 가진 건 영혼뿐.
영혼이 없는 자에겐 평온이 없다.
보는 자는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느끼는 자는 그 자신이 아니다.
페소아는 여덟 살 때 가족들과 아프리카로 이주한 후, 열일곱에 홀로 고향인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그는 리스본을 떠나지 않고 수십 개의 다른 영혼이 되어 글을 써갔다. 그리고 이제, 그가 걷던 밤거리를 걷는 여행자는 그의 글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여행은 대체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안의 다른 영혼들을 더 선명하게 느끼기도 하므로.
가이드가 페소아를 낭독하며 우리를 이끈 곳은 다름 아닌 서점이었다. 서점의 이름은 버트란드Livraria Bertrand로, 현재까지 영업을 하는 서점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곳이다. 페소아의 영문 번역본 산문집을 집어 들었다가 아무래도 읽지 않을게 뻔해, 작가의 다른 책을 펼쳤다. ‘Lisbon : What the tourist should see’라는 일종의 가이드북이다. 이 책은 왠지 ‘너무’ 가이드북 같은 느낌이라 역시 패스. 그가 수십 개의 이명을 사용했다는 것에는 공감하는 바지만, 그와 덜컥 사랑에 빠지기에는 그와 내가 알아온 시간이 너무나도 짧다.
페소아를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해 진 후의 시원한 바람은 걷기에 좋았다. 여행을 오기 전 한국에서 유럽의 폭염 소식을 듣고 조금 겁을 먹은 터였다. 하지만 여행 내내 불어오는 상냥한 바람과 다정한 햇살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3일간의 빼곡한 일정을 소화하고 야간 투어까지 나설 수 있었던 건 9할이 날씨 덕이었다.
옆 나라 스페인은 42도를 치솟는 폭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더워질 때는 바람이 대서양이 아닌 스페인 쪽에서 불어올 때라고 한다. ‘De Espanha, nem bom vento nem bom casamento.’ 한국말로 하자면 ‘스페인 쪽은 바람도 결혼도 나쁘다’ 정도로 해석되는 포르투갈 속담을 소개하면서 가이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항해 시대에는 스페인과 식민지 경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1580년부터 60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사연. 투우 경기는 포르투갈에서도 하는데, 소를 찔러 죽이는 스페인과 달리 소를 죽이지 않고 끝낸다는 포르투갈의 방식. 두 나라의 거리는 플라멩코와 파두의 간극만큼이나 아득해 보인다.
밤거리 투어는 이어졌고, 이야기도 계속되었다. 상 페드루 드 알칸타라 전망대Miradouro de São Pedro de Alcântara로 오르기 위해 푸니쿨라를 타러 갔다. 푸니쿨라는 가파른 경사지를 오르내리는 트램의 일종인데 언덕이 많은 리스본에 총 3개의 노선이 운영된다. 우리가 타려는 노선 이름은 글로리아. 푸니쿨라 2대가 번갈아가며 운행하는 곳이다.
그런데 푸니쿨라는 고장으로 운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젯밤, 파두 공연을 보기 위해 오 파이아O Faia를 찾아가는 길에 관광객으로 가득 찬 푸니쿨라를 옆에 두고 낑낑 걸어 올랐는데, 막상 타려고 하니 탈 수가 없다. 그렇게 낑낑 걸어서 보러 간 파두 공연에서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더랬다. 사우다드Saudade, 그들의 애달픈 정서도 내가 피곤하지 않아야 공감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를 걸어 오르며 가이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다면서, 푸니쿨라가 고장 나서 오르막을 걸어서 올라야 할 때 해드리는 거라면서.
한국의 대학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한 그는 방송사 기자로 사회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내 기자 생활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영국의 에든버러를 거쳐 리스본에 정착했다고. 그의 오빠는 현재 영국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있고, 그는 오빠의 생활비를 다달이 부쳐주는 실질적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의 아버지는 회사 일로 어렸을 때부터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아마도 그들 남매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는, 지극히 사사로운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개인사를 듣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어쩌면 알아듣지 못하는 포르투갈어로 부르는 파두보다도 감미로울 수 있겠다. 더구나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다는 것은 행운과도 같다.
그 행운 같은 속삭임을 들으며 알칸타라 전망대에 도착했다. 리스본 구시가지의 야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곳.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전망대에서 우리의 안내자는 포르투갈의 하늘을 소개했다. 별들이 떠 있었다.
‘한국에서 별 본 지 오래되셨죠?’ 우리의 디제이, 우리의 안내자는 말을 이어갔다. ‘오른쪽을 보시면 저기, 밝고 또렷한 별이 목성이고, 그 뒤로 연하게 빛나는 별은 토성입니다.’
고개를 올려 별을 바라본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지만, 목성과 토성을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리스본에서 올려다본 목성과 토성.
이 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표지 사진 : 전날 밤의 푸니쿨라_ⓒK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