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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ug 07. 2019

스위스의 아침 : 구텐 모르겐

스위스 #2

  오랜만에 여유로운 아침을 맞았다. 일행과는 8시 30분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비 절감을 위해 다른 곳은 콘도를 예약했지만 베른의 하룻밤은 비즈니스호텔에서 각 방을 사용했다. 7시가 채 되지 않아 눈이 떠졌다. 커튼을 열고 창을 열어 바깥공기를 확인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어 밖으로 나갔다. 호텔은 베른 역에서 트램을 타고 네 정거장 거리다. 내가 고른 곳이다.


  시내 한가운데보다 주거 지역의 숙소를 편애한다. 이스탄불에 갔을 때 숙소는 중심가에서 기차를 타고 몇 정가장 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직도 어둑한 숙소 앞 골목에서 동네 사람들과 섞여서 먹던 투박한 생선찜 요리는 잊을 수가 없다. 바르셀로나에서도 그랬다. 시내까지 걸어 나갈 수는 있는 거리긴 했지만, 아침에 창 밖을 내다보면 출근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아침 일찍 숙소 옆의 작은 커피숍에 들어가, 출근길에 담배 한 대와 에스프레소를 위해 잠깐 서있는 사람들과, 자리를 잡고 앉아 아침 신문을 보던 회색 머리의 신사를 아직 기억한다.



  동네 산책을 나섰다. 문을 연 카페가 있으면 에스프레소를 주문할 생각이었다. 토요일 아침의 주택가는 한산했다. 슈퍼 마켓 한 곳 말고는 문을 연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내 오래된 아이폰의 카메라 셔터 소리는 민망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핸드폰은 주머니에 넣고 그냥 걷기로 했다. 반대편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지나치기 전에 다른 골목으로 급히 꺾어 들어간다. 낯선 동양인과 마주치기 싫어서일까? 여행지에서는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마음이 쓰인다.


  트램과 차가 다니는 길을 건너 호텔 반대편으로 가보기로 했다. 밀밭이 펼쳐져 있고 축사나 농가가 드문드문 있는 곳이었다. 길을 건넜을 때, 트램을 타러 가는 여자와 마주쳤다. 출근길이었던 것 같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인사를 하려고 입술을 들썩이다가, 내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자 되려 무안한 표정이 됐다. 그때 나는 마치 그곳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호텔 건너편의 밀밭_ⓒ이이현

  아, 저 사람의 하루가 출근길에 처음 마주친 낯선 이에게 인사도 받지 못하며 시작되었구나. 역시 아시아계는 인사도 할지 모른다는 이미지가 더 굳어지겠구나. 다음에 또 아시아계 여행객을 마주친다면 내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휙 지나쳐버릴 수도 있겠구나.

  한국에서의 습관이 그대로 나타난 결과였다. 한국에서는 낯선 사람을 지나칠 때 시선을 회피한다. 특히 여성을 마주칠 때 일부러 딴청을 하는 건, 당신을 해치지 않고 그냥 지나칠 테니 안심하라는 배려의 제스처다. 하지만 여기에서 낯선 사람을 마주치면 오히려 눈인사를 주고받는 게 서로를 안심시키는 제스처로 작동하는 것 같다.


  밀밭을 구경하고, 소들이 여물을 먹고 있는 축사를 지나쳐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길, 멀찌감치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듯한 사람이 보였다. 좀 전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다. 뭐라고 인사해야 하지? 급하게 핸드폰으로 검색한다. 독어의 아침 인사는 ‘구텐 모르겐’이라고 나온다. 아까 혼자 인사를 하려다 민망해졌던 여자는 다른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일단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그냥 Hello,라고 한다. 땀에 젖어있던 그도 뭐라고 인사말을 건넨다.

  다행이다. 간신히 그의 주말까지 망치진 않은 것 같다.

인사를 무시하고 지나갔던 그 길_ⓒ이이현


표지 사진 : 베른, 어느 주택가의 가로등_이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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