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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ug 12. 2019

튠 호수 : 완벽한 하루

스위스 #4

  배의 출입구를 막고 있던 굵은 로프가 내려가고,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가기 시작했다. 혼자서 한 바퀴 돌고 온다던 S과장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우선 그의 짐까지 들고 배에 올랐다. ‘피 피익!’. 우리가 탄 배는 특유의 기적 소리-기적이란 증기를 내뿜어 내는 소리를 말하니까 문자 그대로 기적인데-를 내며 출발 준비를 알렸다. S과장은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끝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배에서 내려 그와 다음 배를 탈 작정이었다. 여행 중에 일어나는 돌발 상황은 때로, 실은 상당히 자주, 오히려 더 멋진 기억을 만들어주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나는 좀 전에 함박웃음을 짓는 할머니와 함께 사진도 찍지 않았나. 오늘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S과장은 배가 떠나기 정확히 5분 전에 나타났다. 더 멋진 기억을 만들어줄 돌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증기선은 우리 모두를 싣고 출항했다.

  블뤼엠리살프Blüemlisalp라는 이름의 이 증기선은 1905년부터 튠 호수에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배의 이름은 스위스의 같은 이름의 산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리산호’ 정도의 느낌이랄까. 70년 가까이 운항한 이 배는 1971년 폐선 처분될 예정이었으나, 20년 가까이 블뤼엠리살프산(배의 이름을 따온 그 산) 밑의 칸더Kander 강어귀에 계류되어 있다가 2년간의 개보수를 거쳐 1992년부터 재출항했다.  

  선체의 외관과 내부 모두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전면 개보수를 마친 1992년부터라고 해도 30년 가까이 출항하고 있는 배다. 유지 관리에 상당한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배 내부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배 이름이 당당히 새겨져 있다_ⓒ이이현

  배를 탄다는 건 단순히 교통수단을 이용한다는 의미 이상이다. 물론 기분 전환을 위해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가끔 기차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보는 일도 특별하다. 공항에 가서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를 하고 면세점을 거쳐 비행기를 타는 일도 설레는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배를 타는 것이야 말로 이동, 그 자체를 능동적으로 즐기는 일일 것이다.

  기차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에 2시간 가까이 걸리는 배를 타고 가는 건 분명히 가치가 있었다. 스위스의 강은 우리나라의 강물처럼 주변에 모래를 퇴적시키며 유유히 흐르지 않는다. 강이라기보다는 계곡에 가깝다. 강은 아니지만 튠 호수의 주변도 언덕과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숫가의 구릉지에는 듬성듬성 마을이 있었고, 배는 대부분의 마을에 선착했다. 마을들은 크지 않았고, 그 뒤로는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가 보인다. 고층 빌딩도 없고 공기가 맑아서인지 멀리 있는 봉우리도 UHD 티브이 광고 화면처럼 선명하다.

 

  ‘피 피익!’. 선착을 알리는 기적 소리는 산에 부딪쳐 호수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번에 들르는 마을은 메링엔Merligen이라는 곳이었다. 선착장 바로 옆에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호텔이 있었다. 이 호텔은 호수에 안전울타리를 쳐, 풀장뿐 아니라 호수에서도 수영을 즐길 수 있도록 해둔 곳이었다. 8살쯤? 딸아이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한 소녀가 배가 다가올 때에 맞춰 호수로 다이빙을 했다. 그것은, 비슷한 풍경에 조금은 지루해졌을지 모를 승객들을 위한 한바탕 퍼포먼스였다. 승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어떤 이는 소녀의 발랄함이 그저 귀여웠을 것이고, 어떤 이는 저곳에 함께 뛰어들고 싶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집에 두고 온 비슷한 또래의 딸을 생각했을 것이다. 호텔의 이름을 기억해 둬야지. Hotel Beatus. 베아투스, 우리 꼭 다시 만나자.

호텔 베아투스_ⓒP차장

  호수의 폭이 좁아지며 다시 강이 나타났다. 이제 곧 종착지, 인터라켄이다. 이 강을 계속 거슬러 오르면 브리엔츠Brienz 호수가 나온다. 인터라켄Interlaken이라는 지명은 ‘호수 사이’라는 뜻이다. 인터라켄에는 동역Ost과 서역West 두 개의 역의 있다. 선착장은 서역이다. 목적지인 벵엔에 가려면 열차를 2번 더 갈아타야 한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한번, 라우터브루넨 역에서 한번. 라우터브루넨부터는 산악열차다. 급한 경사를 오르기 때문에 기차 레일 가운데에 톱니 형태의 레일이 하나 더 있다. 기차가 움직일 때는 마치 롤러코스터가 경사 레일 위를 오를 때와 유사한 덜컥 덜컥하는 소리가 듬직하고 경쾌하게 울린다.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스위스의 열차 환승은 매우 간편하다. 두 번을 갈아탔지만 전혀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는 K부장의 덕분이기도 하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그는 핸드폰으로 기차 시간표와 플랫폼을 확인하며 우리를 안내했다. 나와 일행은 잘 따라다니기만 하면 됐다.  

  

  1274m 4180ft. 벵엔 역에 도착했다.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한 뼘 더 가까워졌다. 배를 내릴 때부터 다시 오기 시작한 비는 이제 그쳤다. 구름이 걷히고, 햇빛은 만년설에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완벽한 하루다.

벵엔, 해 질 녘_ⓒ이이현


표지 사진 : 벵엔의 거리_ⓒK부장

증기선에 대한 설명은 wikipedia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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