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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ug 14. 2019

융프라우요흐 : 뜻밖의 하이라이트

스위스 #5


  스위스 사람들은 수돗물을 마신다.

  스위스의 첫날, 베른의 호텔에서 방에 무료 생수가 있는지 물었다. 리셉션의, 코 한쪽에 작고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붙인, 영어가 유창한 직원이 대답했다. 프리 워터는 없지만,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 된다고. 그 물을 마셔도 절대 병에 걸리거나 아프지 않을 거라는 말도 덧 붙였다. 아, 스위스에서는 수돗물을 마셔도 되는구나.

  어제 도착한 벵엔의 호텔에도 물어봤다. 산 중턱의 마을이니, 더더욱 수돗물을 마셔도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리셉션에 있던, 금테 안경을 쓰고 행거치프까지 꽂은 푸른 스트라이프 정장의 직원이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수돗물은 너를 절대 해치지 않을 거야.’

  그냥 마셔도 된다고 하면 될 것을 꼭 한 마디 덧붙이는 게 재미있다. 그들의 대답에서, 스위스 사람의 여유와 모국에 대한 자긍심을 엿본다.

지하수를 항상 흐르게 틀어둔다_ⓒK부장

  오늘은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에 오르는 날이다. 알프스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융프라우Jungfrau로, 융프라우요흐는 융프라우 근처의 산등성이다. 오른다고는 했지만 직접 등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곳까지 산악열차가 연결되고, 전망대 및 각종 편의시설이 있기 때문에 우리 같은 관광객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어제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씨는 오늘도 계속될 것 같다. 이 정도 비로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지. 나는 날씨를 믿는 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날씨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는 말이다. 마치 스위스의 수돗물처럼. 이 근거 없는 믿음으로 여행가방에 우산도 넣지 않았다. 사실 여행 중 우산을 꼭 써야 할 정도로 비가 온다면 어디든지 들어가서 비를 피하는 게 맞다. 그 정도 비가 아니라면 우산은 꼭 없어도 된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여행자의 특권 중 하나니까.


  융프라우요흐에 가기 위해서는 클라이네 샤이덱Kleine Scheidegg에서 열차를 한번 갈아타야 한다. 우리는 고도 적응도 할 겸, 이 곳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마침, 하늘도 깨끗해져서 사진을 찍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한 껏 들뜬 우리는 점프를 하며 사진을 찍기로 했다. 옆에 있던 일본인 여행객에게 연사로 사진을 찍어 줄 것을 부탁했다. 평균 나이 42세, 아저씨 네 명의 천진한 점프 사진. 가히 이번 리스본-스위스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순간이다.    


  다시 기차를 타고 1,510미터를 더 올라간다. 이제 융프라우요흐 전망대다. Top of Europe, 유럽의 지붕. 상징적인 곳이다 보니 스위스의 여느 곳보다도 관광객이 많다. 100여 년 전, 아이거Eiger와 묀히Mönch의 암벽을 뚫고 산악열차 레일을 까는 모습을 재현한 전시를 보며 전망대로 차근차근 올라간다.

  사실, 산악열차를 타고 손쉽게 오른 이 곳에서 특별한 감흥이랄 것은 없었다. 이 곳에 오기 위해 한 일이라고는 고작 고산병 예방을 위해 타이레놀 두 알을 삼키고, 짐을 다음 숙소가 있는 그린델발트로 부치고,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열차를 한 번 갈아탄 게 전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해낸 스위스인들의 노고 덕에 나는 해발 3,571미터 위에 서있다. 감탄스럽고 감사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이 감탄과 경의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무리가 있었다. 야외 전망대인 고원지대(Plateau)에서 스위스 국기를 붙들고 인증 사진을 찍을 때였다. 예닐곱 명의 이십 대 여성이 알레취 빙하를 향해 일렬로 섰다. 그리고 주섬주섬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7월이지만 이 곳의 기온은 영하다. 그런데 티셔츠까지 벗는다. 하하, 젊구나, 생각하는데, 급기야 가슴을 가리던 브래지어까지 풀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나왔다. 이 곳의 온도가 1도쯤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오전의 클라이네 샤이덱은 하이라이트가 아니었다. 스위스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융프라우요흐다. 산악열차로 손쉽게 올라왔다고 꼭 감흥이 없으란 법은 없다.

뜻밖의 하이라이트_ⓒK부장


  다시 전망대로 들어와 기념품으로 딸의 티셔츠를 한 장 사고, 식당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여기에서 컵라면을 먹는다. 스위스나 융프라우에 관심이 없던 나도, 알프스의 어느 곳에 올라가면 신라면을 파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 없더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던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감탄할 맛은 아니었다. 지난 6일간 유럽의 음식은 생각보다 물리지 않았고, 컵라면을 먹는 실내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정도로 춥지도 않았으니까. 그보다 약간은 섬뜩했다. 스위스에 방문한 한국인의 공통된 기억이 겨우 컵라면이라니. 확실히 낭만적이지는 않다.


  컵라면을 먹고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커피도 한 잔 마시고,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오늘 찍은 사진도 들여다본다. 슬슬 일어날까 하는데 ‘여기 엽서 부치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요?’ S과장이 말한다. 열차 시간이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응? 그런 게 있어?’ 기차를 타려면 한 층을 내려가야 했지만, 우리는 다시 3층으로 올라갔다. 붐비는 기념품 샵에서 재빠르게 엽서와 우표를 계산하고, 한국에 있는 딸과 아내에게 엽서를 썼다. ‘다음에 꼭 같이 오자, 사랑해’라고 쓰고 그 옆에 하트를 잔뜩 그려 넣었다.

  글쎄, 속옷까지 탈의한 여성 무리를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비유한 이 글을 읽은 아내가, 엽서를 받아 들고 얼마나 낭만적인 기분이 들지는 잘 모르겠지만.


표지 사진 : 클라이네 샤이덱의 점프_ⓒK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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