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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ug 16. 2019

그린델발트 : 쓸쓸한 젠가

스위스 #6


  융프라우요흐에서 내려올 때는 아이거글레쳐Eigergletscher 역에서 내려 클라이네 샤이덱까지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아이거Eiger 북벽을 끼고 내리막을 걷는 코스이다. 알프스까지 와서 산악열차만 타고 돌아가기에는 아무래도 아쉽다. 기차역 한 정거장 거리이기 때문에 부담도 없고, 아이거의 북벽을 바라보며 걷는 일은 일생에서 흔한 기회는 아니다.


  아까, 융프라우요흐에 오르기 전 잠깐 화창했을 때를 빼면, 대체로 구름이 낀 날이었다. 쨍하고 선명한 맛은 조금 덜해도 걷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아이거 북벽의 반대쪽으로는 어제 묵었던 벵엔이 저 멀리, 장난감 마을처럼 보인다. 때마침 구름 사이의 햇살이 이 장난감 마을을 보드랍게 보살핀다. 사람들은 이 보살핌 속에서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햇살을 받는 벵엔_ⓒ이이현

  두 시간 정도를 걸어 클라이네 샤이덱에 도착했다. 오전에도 들렀지만, 왠지 그냥 내려가기는 아쉽다. 오전에는 문을 열지 않았던 동그란 형태의 야외 바에 앉았다. 육십은 돼 보이는 금발의 할머니가 바텐더를 맡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려 주름이 선명하다. 그렇지만 직접 선곡한 음악과 옷차림은 여느 이십 대 못지않다. 어떻게 저 연세가 되도록 저런 패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촌스럽다’는 말은 스위스에는 없을 것이다. 이 곳 사람들은 산 중턱, ‘촌’에 살아도 힙한 감각을 잃는 법이 없다.

  천막으로 된 바의 지붕과 벽에는 여행자들의 낙서로 가득했다. 우리도 각자의 이니셜을 쓰고 가족들과 다시 오기를 기원했다. 가장 먼저 다시 오는 사람에게 여행 경비를 보태 주기로 결의도 해보고. 다시 왔을 때 이 바를 지키는 바텐더가 다른 사람이라면 조금은 아쉬울 것 같다.


  그린델발트Grindelwald는 아까 하이킹을 하면서 바라본 아이거의 북벽을 배경으로 하는 마을이다. 벵엔보다는 규모가 커서 시내는 제법 관광지 분위기도 난다.

  아이거가 보이는,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큰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비가 제법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식당의 천막 아래 안전하다.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감자튀김과 치즈버거를 입에 넣으면 된다. 관광지지만 버거의 퀄리티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 치즈와 소고기로 만든 버거는 어디에서든지 훌륭한 맛을 낸다.


  여행의 막바지다. 숙소에 이대로 들어갈 수는 없다. 팁과 함께 계산을 하면서 종업원에게 여기서 가장 괜찮은 바가 어디인지 묻는다. 검정 뿔테 안경을 낀 착해 보이는 종업원은 웃으며 약간 난처해한다. ‘음... 여기에 바가 두 개 밖에 없어서, 어디가 더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며 두 군데를 알려준다. 지나가면서 보니 두 곳 모두 한산하다. 벵엔보다는 큰 마을이지만, 여전히 번잡하지 않은 동네인 것이다.


  아보카도 바라는 이름의 술집에 들어갔다. 조용한 바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동네 남자 몇 명은 한쪽 벽에서 다트 게임을 하고 있다. 동전을 넣으면 불이 들어오고 점수를 계산해주는 전자식 다트가 아니고, 실제 경기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투박한 스틸 다트판이다. 그들이 나갔을 때는 우리가 다트판을 차지한다. 그 외는 딱히 할 게 없다. 잠시 후, 나갔던 그 동네 친구들이 다시 들어오더니 몇 게임을 더 한다. 그들에게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는 일요일 밤인가 보다.

  마침 다른 테이블에서 젠가 블록이 담긴 바구니를 발견한다. 젠가라도 해볼까.

  

  떠나기 이틀 전 밤이다. 어두운 바에서 남자 넷이 젠가 블록을 조심조심 빼내는 모습은 어쩜 적막하기까지 하다.  

아보카도 바_ⓒK부장


표지 사진 : 아보카도 바_ⓒK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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