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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ug 19. 2019

피르스트 : 손가락의 상처

스위스 #7


  그린델발트에서의 둘째 날. 8박 9일의 마지막 밤이다.

  어젯밤에 갔던 아보카도 바에 다시 들어갔다. 바텐더가 바뀌었다. 쾌활했던 어제의 바텐더와는 달리 조금은 무뚝뚝하다. 술집은 오늘도 한산하다. 다트 게임은 어제만큼 흥이 나지 않고, 젠가는 더더욱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음악은 좋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의 노래가 연달아 나온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 잔으로 두 잔을 비우고 공용 경비 카드로 계산을 했다. 나는 주머니에 남아있던 동전을 털어 팁으로 줬다. ‘이건 음악 값이야.’ 바텐더의 표정이 환해졌다. ‘나 이 밴드 팬이거든.’ 여행 중에는 현지인과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은 법이다.  어쩌면 그 팁은 음악 값이라기보다는 한마디 대화 값이었다.


  숙소로 올라가기 전, 호텔 1층의 바에 들렀다. 굳이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들 피곤했고, 술을 더 마시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서도 위스키를 시켰는지, 아니면 맥주를 마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이 아쉬웠을 것이다.   

  숙소에 들어와서는 K부장과 와인을 마셨다. 다른 두 명은 그대로 침대에 뻗어 잠이 들었다. 여행 첫날 리스본에서 샀던 와인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숙소에 일찍 들어가는 법이 없었으니까. K부장은 여행 내내 와인이 들어있는 무거운 짐가방을 옮겨야 했다. 나도 어서 침대에 눞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인을 운반해야 했던 K부장을 생각해 건배를 하며 한 병을 비웠다.

  잔을 부딪쳐 건배를 하는 일은 매번 어색하다. 한두 번이야 재미로, 반가움의 표시로 한다고 하지만, 매번 잔을 부딪쳐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이번 여행 중에는 아침을 빼면 끼니마다 맥주나 와인을 곁들였는데, 그때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인 것마냥 쨍그랑 소리를 내며 잔을 부딪쳤다.

  이마저도 이제 끝나간다. 식사 때마다 반복했던 한국식 건배도, 매끼 음식 사진을 찍는 것을 기다리는 것도, 가끔 건배하는 모습을 웨이터에게 찍어달라고 하던 일도.   



   낮에는 트레킹을 했다. 먼저 곤돌라를 타고 피르스트First에 올라갔다. 피르스트에서 바흐알프제Bachalpse 호수까지 왕복을 하는 코스다.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이고, 왕복으로 2시간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바흐알프제 호수에 비치는 슈렉호른Schreckhorn의 사진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 날은 구름이 많아 아쉽게도 봉우리가 물에 비치는 모습까지는 볼 수 없었다.

바흐알프제 호수_www.walterneukommphoto.ch


  피르스트에서는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기도 하다. 우리는 숙소가 있는 그린델발트까지 마운틴 카트와 트로티 바이크를 타고 내려오기로 했다. 마운틴 카트는 작은 경주용 자동차의 형태고, 트로티 바이크는 킥보드와 자전거를 혼합한 형태다. 경사를 내려오는 용도라서, 둘 다 별도의 동력장치는 없고 브레이크만 달려있다. 처음에는 마운틴 카트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간 지점에서 카트를 반납하고 트로리 바이크로 갈아타야 한다. 걸어서 내려가기에는 부담스럽고, 다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기에는 아쉬울 때 적절한 선택지다.


  카트에서 트로티 바이크로 갈아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앞서 가다가 잠시 멈춰 쉬고 있던 K부장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화답을 하려로 오른쪽 손잡이를 놓고 손을 흔들려는 순간 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자칫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잠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었다. 길을 올라가던 승용차가 멈춰 창문을 내리고 ‘괜찮은 거야?’ 물었다. ‘괜찮아, 고마워’하고 상태를 확인해보니 오른손 손가락의 마디가 심하게 파이고, 왼쪽 어깨와 오른쪽 무릎이 땅에 부딪쳐 멍이 들어 있었다. K부장이 손을 괜히 흔들었다며 미안해했지만,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핸들에서 손을 뗀 건 나다.


  그때의 상처는 한국에 돌아오고 한 달 가까이 된 지금껏 남아있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문득문득 손가락에 두껍게 내려앉은 딱지를 본다. 검지에는 아무래도 흉터가 남을 것 같다. 언뜻언뜻 이 흉터가 아려올 때면, 조금은 흐렸던 이 날의 피르스트가 떠오를 것이다.  

건배_ⓒK부장


표지 사진 : 피르스트를 내려오다가 만난 소_ⓒK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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