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8
지역마다 스타벅스에 가면 그 지역의 시티컵을 살 수 있다. 시티컵은 해당 도시의 매장에서만 살 수 있는 빅사이즈 머그로, 지역을 상징하는 그림과 그 도시의 이름이 찍혀있다. 한국만 해도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 많은 도시의 시티컵이 있다.
이 머그잔을 모으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 잔을 사기 위해 도시마다 스타벅스에 들렀다. 그러니까, 리스본에서, 베른에서, 그리고 여기 루체른에서.
여행의 마지막 날, 취리히에서 떠나는 비행기 시간은 저녁 7시 30분이었다. 공항에 가기 전, 루체른Luzern을 구경하기로 했다. 취리히보다는 루체른에 볼거리가 많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도시는 취리히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거리로, 로이스Reuss 강과 루체른 호수가 만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빈사의 사자상Löwendenkmal, 무제크Musegg 성벽, 그리고 카펠교Kapellbrücke를 구경하는 동선을 짰다.
우선 빈사의 사자상을 보러 나섰다. 이 사자상은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트윌리 궁을 지키다가 전사한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조각상이다. 가난했던 그들의 선조는 그들이 물러설 경우 후손들이 용병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끝까지 퇴각하지 않고 궁을 지켰다. 사자는 밝은 회색빛의 대리석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데, 작은 연못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칼에 찔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죽어가는, 혹은 이미 죽은 사자의 모습은 그 자체로 어떤 울림을 준다. 이 사자상을 보고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썼다.
이 사자는 깎아지른 벼랑에 마련된 그의 은신처에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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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변은 녹음으로 우거졌다. 이 곳은 포근하고 아늑한 숲 속으로, 세상의 모든 풍파에서 격리된 곳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이 사자가 전사할 곳으로 걸맞다- 시내의 광장 한가운데 화려한 철제 난간에 둘러싸인 채 화강암 받침대 위에 있는 것보다는 말이다. 이 루체른의 사자는 다른 어느 곳에 있었더라도 감명 깊었을 것이나, 여기 이 곳에서만큼 장엄하지는 않았으리라.
정말 그렇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 곳 도심 속의 연못과 바위만큼 이 고통스러운 사자-스위스 선조들의 희생적인 삶을 대변하는-의 은신처로 적당한 곳은 없을 것 같다. 대로에서 그리 멀지 않고, 주위에는 건물들도 많지만, 이 사자가 은신하는 이 작은 공원만은 평화롭다- 물론 지금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세상에서 격리된 느낌은 주지 않지만, 이제 더 이상 다른 나라에 용병으로 파병되지 않아도 되는 후손을 본다면 이 사자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울 것이다.
루체른의 또 다른 볼거리는 무제크 성벽이다. 마을 전체를 둘러싸 루체른을 요새로 만들었던 성벽은 현재 일부만 남아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바라보는 루체른의 풍경은 여전히 멋지다. 또한 성벽에 남아있는 아홉 개의 탑 중 시계탑이 하나 있는데,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계단을 오르며 톱니바퀴들을 보면 메이드 인 스위스 손목시계 안을 난쟁이가 되어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카펠교에 가기 전에 우선 점심을 먹기로 했다. 무제크 성벽을 걷고 난쟁이가 되어 시계 안을 구경하느라 허기가 진다. 어디서 먹을까? 작은 광장 주변으로 상점들이 모여있는 시내를 두리번거리다가, ‘강변, 테라스석 있음’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응 여기 강이 안 보이는데? 속는 셈 치고 들어가 보니 바로 계단이 나온다. 어두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상당히 넓은 규모의 제법 격식 있는 식당이 나오고, 홀의 반대쪽은 강변과 닿은 넓은 테라스가 마련돼있다. 작은 행운이었다. 하마터면 작은 광장 옆의 특색 없는 식당에서 여행의 마지막 식사를 할 뻔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강변을 따라 카펠교까지 갈 수 있었다. 이 우아한 목조 다리는 본래 요새 도시였던 루체른의 방어벽과 방위 탑으로 사용되었다. 튠에서 봤던 다리와 같은 형태이지만 규모가 훨씬 크다. 로이스 강과 카펠교. 가히 루체른의 랜드마크라 할 만하다.
카펠교를 구경하기 전, 스타벅스에 들렀었다. 식당에서 구글 맵을 확인 해 보니 근처에 스타벅스-시애틀에 본사를 둔 유명한 커피 체인점 (구글 맵 왈)-가 있었던 것이다. 커피를 주문하기 전 다들 시티컵을 먼저 집어 들었다. 이 컵에는 특색 없는 폰트로 ‘Lucerne’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부분의 시티컵은 같은 폰트로 도시명이 쓰여있다.) 배경 그림은 사자상도 아니고, 무제크 성벽이나 시계탑도 아니었다. 카펠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컵 뒷면에 그려져 있었다. 연한 커피색의 모노톤으로 그려진 메인 배경으로는 트램이 그려져 있었다. 지금은 루체른에 다니지도 않는 옛날식 트램. (대부분의 시티컵은 같은 톤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톤으로는 아무리 잘 그려도 특색이 없어 보일 것 같다.)
스타벅스 점원은 이 컵을 한 사람에 하나씩 사는 우리에게 ‘한국에서 왔니?’라고 물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창가에 넓은 소파석이 있었는데 한국인 여행자 무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동안 몇 사람이 자리를 뜨고 새로운 한국인 한쌍이 올라와 2층은 모두 한국인 차지가 됐다.
작은 행운 같았던 강변의 식당과 그 옆의 스타벅스. 뭐, 한국에 돌아가는 날에 제법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기도 하다.
마크 트웨인의 글 : 위키피디아 영문판 참조
표지 사진 : 카펠교에서 바라본 스타벅스가 있는 거리_ⓒ이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