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3
스위스의 둘째 날, 오늘은 벵엔Wengen으로 숙소를 옮긴다. 다음 날, 융프라우요흐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융프라우 산을 구경할 때는 인터라켄Interlaken에 베이스캠프를 잡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벵엔은 인터라켄에서 열차를 타고 오르면 나오는 해발 1274미터의 작은 마을이다. 여기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그린델발트Grindelwald로 이동해 마지막 이틀을 보낼 예정이다.
벵엔에 가기 위해서는 인터라켄을 거쳐야 한다. 기차를 타면 1시간이 채 안 걸리지만, 우리는 튠Thun에서 기차를 내려 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튠 호수를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튠 역에 도착하니 11시다. 계획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이번 여행은 대체적으로 일정에 여유가 있다. 성인 남자 넷의 조합은 상당히 일사불란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원래 12시 40분의 증기선을 탈 예정이었으나, 이왕 일찍 도착했으니 11시 40분에 떠나는 일반 대형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선착장에는 12시 40분 출항을 대기 중인 증기선도 떠있었다. 스위스의 모든 일정을 계획한 K부장은 증기선에 다가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 좀 더 기다렸다가 증기선 타자.’ 지금 아니면 옛날 방식으로 운전되는 증기선을 또 언제 타볼까. 찬성이었다. 부슬거리던 비도 때 마침 멈췄다. 역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볼 시간은 충분했다.
튠은 아레강과 튠 호수가 만나는 곳에 있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강을 중심으로 시내와 마을이 형성돼 있다. 작은 도시지만 역시나 아름다운 곳이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엽서가 되는 곳. 스위스의 어딜 가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차보다 자전거를 많이 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도시는 꽃을 사랑한다. (내 마음대로 그렇게 결론지었다.)
튠 역에 내리자마자 눈에 띈 것은 꽃집이었다. 이렇게 작은 역사에 꽃집이 있는 게 신기해 들어가 보았다. 생각보다 큰 가게 안은 형형색색의 꽃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로 보이는-관광객이 꽃을 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손님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꽃을 한 아름 신문지에 싸서 자전거 바구니에 싣고 집에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역에서 나오니 길거리의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제라늄이 사람 덩치보다 큰 검정 화단에 믿기 힘들 정도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이 화단은 역 앞의 메인 도로(라고 해봐야 왕복 2차선이지만)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또한 비슷한 분위기의 작은 화단들이 아레 강변의 난간을 따라 이어졌다. 어떤 고급 호텔에서도 보기 힘들 것 같은 꽃장식은 마치, ‘우리는 꽃을 매우 사랑합니다’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니 루체른의 카펠교와 비슷한 형태의 다리가 나타났다. 지붕이 있는 목조 다리로 중간 부분에서 굴절되는 형태로 수문의 역할도 겸한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K부장이 말했다. 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구경하다 가요.’
카페며 음식점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니 플리 마켓이 열려 있었다.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다. 바이닐이며 오래된 CD, 더 이상 신지 않는 가죽 샌들이며 단화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떤 아저씨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기념품 소 방울을 딸랑거리며 우리에게 보여준다. 진짜 소의 목에 걸었던 방울이었다면 가격을 흥정했겠지. 기념품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니 소 방울이었다.
‘막상 살만한 건 안 보이네.’
거의 마지막 가게에 다 달았다. 어느 할머니가 펼쳐놓은 상 위에 접시며 찻잔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내가 생각났다. 오래되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고급 제품이다. 접시 뒷면을 보니 Made in England가 필기체로 커다랗게 쓰여있다.
‘아내가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럼, 사!(buy!), 하하’
무엇보다 하나에 0.5프랑이다. 이 가격이면 아무리 잘못 사가도 아내에게 혼 날 일이 없다. 무난하고 깨끗해 보이는 작은 접시 3개를 골랐다. 2.5유로라는 커피잔도 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손잡이 부분이 깨질 것 같아 단념했다. 플리 마켓에서 아내의 선물을 고르는 남자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것도 깨지기 쉬워 애지중지 가지고 다녀야 하는 접시를 말이다. (아내가 선물을 마음에 들어할지는 모르겠지만) 플리 마켓에서 물건을 샀다는 사실 하나로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저, 사진 좀 같이 찍어도 될까요?’
‘응, 그래, 어!? 나랑 같이?’
옆 자리에서 옷을 팔며 내가 접시 사는 걸 지켜보던 부부가 깔깔 웃는다. 할머니도 손자뻘로 보이는-서양인은 보통 동양인을 매우 어리게 보니까-동양 남자의 제안이 싫지 않았나 보다.
‘이러니까 내가 꼭 네 할머니 같은데?’
‘하하, 맞아요, 할머니!’
포즈를 취하려고 옆에 가서 쪼그려 앉자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과연, 꽃을 사랑하는 도시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표지 사진 : 튠 역의 꽃집_ⓒP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