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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ug 05. 2019

베른 : 스위스 간지

스위스 #1

  포르투갈 항공으로 제네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금요일이었다. 공항의 수화물 찾는 곳에는 스키나 스노보드 장비를 찾는 곳이 별도로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두터운 파카를 입은 휴가객들이 스키며 보드를 찾는 광경을 떠올리니 괜스레 내 마음도 달떴다.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리스본과 달리 스위스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인 일정이 있었다. 스위스에 벌써 세 번째인 K부장 덕분이었다. 대략적인 일정은 이렇다.

1일 차 : 베른 시내 관광

2일 차 : 인터라켄까지 기차 및 배로 이동, 벵엔 숙소 도착

3일 차 : 융프라우요흐 관광, 아이거플렛쳐에서 클라이네 샤이덱까지 하이킹, 그린덴발트로 숙소 이동

4일 차 : 피르스트 하이킹 및 액티비티

5일 차 : 루체른 시내 관광, 저녁 비행기로 귀국

제네바 국제공항, 스키 찾는 곳_ⓒ이이현

  이동이 많아 교통편을 갈아탈 때마다의 번거로움을 걱정했는데, 스위스의 대중교통은 훌륭했다. 우선 제네바 공항에서 제네바 역으로 기차를 타러 가는 길부터 수월했다. 공항과 기차역의 경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수화물을 찾고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기니 어느새 기차역의 플랫폼에 다 달아 있었다.

  그러니까, 서울역과는 많이 달랐다. 무거운 짐을 낑낑 들고 육중한 계단을 오르면 매표소가 나타나고, 기차를 타기 위해서 다시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플랫폼으로 내려가야 하는, 기이한 구조의 그곳 말이다.

  또한, 개찰구가 따로 없어 짐을 옆에 내려놓고 지갑을 찾느라 주머니를 뒤적거릴 필요도 없었다. 정당한 표만 있다면 자유롭게 타고 내리면 그만이다. 시민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대중교통 시스템을 계획한 결과일 것이다.


  베른Bern까지 가는 길의 창 밖 풍경은 한국의 농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간간히 빨간색 스위스 국기가 보이고, 농가의 모습이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서 보던 모습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리고 기차 안은 상당히 더웠다. 강한 아침 햇살로 데워지는 열차 칸에 비하면 냉방은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하지만 더위마저 산뜻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마음이 여유로우면 이 정도 더위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더구나, 나는 한국의 강한 에어컨 바람이 싫어 여름에도 항상 긴팔 셔츠를 휴대한다. 이 곳에서는 적어도 한 여름에 추워서 긴팔을 챙겨야 하는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스위스라는 나라는 관심 밖에 있었다. 유럽이라고 하면 파리나 바르셀로나, 런던같이 옛 건물과 현대적 건물이 세련되게 섞여있는 도시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산을 좋아하지도 않고, 등산이나 하이킹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 스위스 하면 그냥 ‘시계’나 ‘중립국’ 정도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융프라우’를 착각해 ‘안나푸르나’라고 말했을까. 베른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도 내 기대는 그리 높아지지 않았다. 훌륭한 대중교통 시스템 하나로 갑자기 그 나라에 관심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니까. 더구나 창 밖 풍경은 한국의 강원도나, 남도 지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작년 겨울, 딸이 여섯 번째 생일 선물로 유치원 같은 반 친구에게 부루마블 게임을 선물로 받았다. 이 게임은 세계 각국의 도시에 땅을 사고, 호텔이나 빌딩, 별장을 지어 통행료를 받는 게임이다. 그중에는 물론 베른도 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베른은 이 보드게임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고, 부동산 값도 낮게 책정되어 있다. 이 도시의 카드에는 별로 유명할 것도 없는 시계탑-파리의 에펠탑이나, 런던의 타워브리지에 비하면-이 그려져 있다. 전혀 매력적인 부분이 없다.

부루마블 게임의 베른 카드_ⓒ이이현

  직접 가본 베른은 시계탑만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베른의 중심부에는 아레Aare강이 굽이쳐 흐른다. 이 강을 경계로 서측은 구도심, 동측은 신도심으로 나눌 수 있다. 유속이 상당히 빠른 이 강을 거슬러 오르면 튠 호수가 나오고 이 호수를 또 거슬러 오르면 결국 알프스 산맥이 나온다. 강물이 에머럴드 빛을 띠는 건 알프스의 빙하가 녹은 물이라서 그렇다.

  K부장의 안내로 강변으로 내려갔다. 스위스 연방 궁전의 옆 길로 들어가면 강 쪽으로 내려가는 케이블 철도-리스본의 언덕지형을 오르내리는 푸니쿨라와 비슷한 형태의-가 있었다. 대중교통의 성지답게, 스위스 패스만 있으면 누구나 이용 가능했다. 다시 한번 이 나라의 대중교통에 감탄하며 강가로 다가갔을 때, 더욱 감탄할 만한 광경을 목격했다. 사람들이 강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수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응, 강에서 수영을 한다고? 여기 도시 아니야?’

  대부분의 도시에는 강이 흐른다. 파리에는 센강이 흐르고, 영국에는 템즈강, 서울에는 물론 한강이 있다. 하지만 수영을 하는 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몇 년 전, 파리의 센 강 한쪽에 물을 가두고 수영장을 만들어 개장을 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다. 30년간 수질 개선에 노력한 결과라며 나름 떠들썩했던 것 같다. 이 밖에는 어느 도시에서도 강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수영을 하는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1년간 머물렀던, 자연환경이 비교적 잘 보존된 호주에서도 도심의 강에서는 수영하는 걸 보지 못했다.

  물론 베른은 대도시는 아니다. 수도이기는 하지만, 하루면 어지간한 시내 관광을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고, 고층 빌딩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수영을 하는 모습은 내게 문화 충격 그 자체였다.

아레강, 고무보트에서 내리는 모습_ⓒP차장


  강을 따라 북쪽으로 가니, 강이 동쪽으로 꺾이며 폭이 갑작스레 넓어지는 곳이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강물의 낙차가 생기기 때문에 상류에서 놀다가 여기까지 떠내려 오면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곳에 ‘테라쎄Restaurant Terrasse’라는 식당 겸 바가 있었다. 강물 위에 테라스를 지어 올려 영업하는 곳인데, 물소리가 제법 요란한 곳이다. 여기에서 강물과 그 소리를 배경으로 맥주를 한잔 비웠다.

  또, 장미공원에 가 황홀한 장미 향을 맡으며 베른의 전경을 눈에 담고, 곰 공원(베른Bern의 상징은 곰, Bear다) 옆의 전망 좋은 식당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식사도 하며 호사로운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내게 가장 뚜렷이 각인된 기억은 역시, 아레강에서, 그러니까 아레강 물속에서 평화로운 금요일 오후를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던 사람들이다.

  강물 위에 매어 놓은 줄에서 줄타기 연습을 하던 긴 머리의 여자, 낮은 다리 위에서 몸에 줄을 매달아 강물로 떨어지며 놀던 무리들, 곰 공원의 강가에서 발을 담그고 책을 보던 아주머니.


  강가에서 책을 보던 아주머니 옆에 앉아, 우리도 양말을 벗어놓고 강물에 발을 담갔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은 얼얼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때, 우리의 옆으로 단정한 금발머리 청년 둘이 다가와 앉았다. 수영복 바지만 입은 채였다. 한쪽 손에는 입던 옷을 담은 듯한 방수팩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뭐라고 대화를 하며 차가운 물을 몸에 조금씩 묻혔다. 에머럴드빛 물은 햇살에 반짝거렸다. 몸을 적시던 그들은 휙, 옷이 담긴 방수팩을 강물 위에 던졌다. 방수팩은 부력이 있는지 물 위에 떠서 흘러 내려갔다. 그리고 두 청년은 방수팩을 따라 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방수팩 위에 팔을 걸치고 느긋하게 물길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나와 물기를 털고 옷을 꺼내어 입을 것이다.


  여행을 갈 때마다, 여기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은 수없이 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온 사람들을 마냥 부러워하는 수밖에.


  다이빙을 하고 유유히 떠내려 가는 두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스위스 간지구나.

장미공원에서 바라본 베른의 전경_ⓒK부장


표지 사진 : 아레강의 줄타기_K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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