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있다. 경계를 짓기 애매한 상태.. 그러니까 마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같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관심이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변해간다. ‘응? 예쁜데..’ 하는 첫 만남에서 조금씩 눈길이 가고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자꾸 쳐다보다 여러 가지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그 시간은 왜 이리 빨리 지나가는지 야속한 시간은 더 이상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고 나를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둔다. 발밑의 조그마한 돌이 보인다. 괜히 한 번 차 보지만, 아무 소용 없다. 이미 내 머릿속은 그녀가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로 가득 차 있으니까.
이제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시야에 자꾸 나를 들이민다. ‘나 여기 있으니까 한 번 봐줘요.’ 시험을 앞두고 있던, 8시 30분까지 회사에 가야 되건, 눈앞에 친구가 앉아서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걸며 욕을 하던 모두 상관없다. 이성이 아닌 감성께서 직접 선택과 집중을 원하시니까.. 그 순간, “저기요.” 드디어 그녀가 말을 건다. ‘내게 다가오나?’ 설마 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내 심장은 이미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뛰고 있었다. 그런데 내게 말을 걸다니.. 이렇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호기심에서 호감으로 서로의 감정을 한 단계 뛰어넘는다.
“나와 결혼해 줄래?”
내 눈앞에 사랑하는 나의 여자가 있다. 평생을 이 사람과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다. 나 또한 이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다. 엄마가 반대해도 상관없다. 주변 친구들이 말려도 괜찮다. 내 사랑은 위대하다. 수능시험을 볼 때(참고로 오늘은 2020년 수능시험일이다.), 아리송한 문제를 몇 분이나 쳐다보고 또 쳐다보다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확신에 찬 답 3번을 찍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신할 수 있다. 내 사랑은 틀리지 않았다고, 이 사람의 행복한 인생을 책임지기에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자라면 위의 이야기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나의 이야기는 전혀 아니고 출근하기 전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 이야기이지만, 저 감정들은 경험에서 묻어나는 철저히 사실인 남자의 마음이다. 현정아, 남자들의 마음은 저렇게 변해 간단다. 물론 저 이후의 감정의 변화들도 있지만, 그 이야기는 잠시 미뤄 두기로 하자. 호기심에서 호감으로, 호감에서 사랑으로.. 언제부터 호감이고, 언제부터 사랑일까? 그 순간을 칼로 그어 낼 수 있을까? 만일 네가 나에게
“아빠는 언제부터 엄마를 사랑했어?”
라고 묻는다면 나는 정확한 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네 엄마 앞에서는
“처음 만날 때부터 눈이 그냥 하트 뿅뿅이었지.”
라고 말하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감정의 진도를 무척이나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경계를 알 수 없지만, 그 속도만큼은 자부할 수 있다. 이렇듯 살아가는 동안에는 경계를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시나브로 그렇게 되어 있다.
네가 그렇다. 그렇게 되어 버린 것 같다. 태어나서 한동안 가족 구성원이라는 느낌보다는 사실 양육의 대상으로 개체 수가 1 증가한 느낌이 강했다. 그 개체를 꾸준히 지켜냈더니, 이제는 엄연한 1인으로서 의사결정의 중요한 객체가 되어 있다. 우리 가족은 이제 “3”명이지, 아기가 하나 있는 “2+1”의 신혼부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 경계를 무 자르듯 정확하게 언제부터 시작이라고 정의 내리지 못하지만 개체에서 객체로 너는 이제 다른 의미가 되었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조금 더 심오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내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은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물론,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2000년 대 초반을 사는 한 중년의 아빠 이야기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안에서 너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고 성장하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울림이 있었으면 한다. 객체가 된 너에게 나는 나의 삶을 더 꾹꾹 눌러서 너의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이니까. 마치 한 번 살아 본 것 같이 너의 앞으로의 인생이 온갖 어려움을 만나도 낯설지 않도록.. 한 번 시작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