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이 무언가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예의 바르지 못한 말을 했다고 판단되었을 때, 부모는 자녀를 제지하고 타이르게 된다. 반복되는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치며 엄중한 경고를 날리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아이에게 화를 내게 된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버릇을 고친다는 생각으로 또 자녀가 자랐을 때는 좀 더 올바른 어른이 되라는 뜻으로 분명 선의를 가지고 자녀를 혼 내게 된다.
생각해 보자.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녀로 인생을 시작한다. 부모의 선의를 그 뜻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도 어렸을 때에는 분명 잘못을 했을 것이고, 부모의 뜻에 맞추어 금방금방 착한 어린이로 둔갑하는 말 잘 듣는 아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마흔을 앞둔 나이에도 부모님께서 하는 인생의 쓴소리는 늘 내가 원하는 만큼 덜어서 받아들이고 때로는 부모의 걱정에 찬물을 끼얹고 대들기도 하며 오히려 부모를 가르치려는 시도도 여럿 있었던 것 같다. 선의는 결코 선의대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부모가 되었다. 역할이 바뀐 것이다. 조금씩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소리가 더 잘 들리고 분명하게 와닿는다. 역시 사람이란 누군가의 상황이 되어보아야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너는 나의 자녀로서 나를 부모로 바라보겠지만, 그 상황은 결코 이해되지 않으리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도 나는 네가 무언가 잘못했다고 생각이 들면 그렇게도 너를 다그친다. 나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부모와 자식으로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의 강이 조금씩 흐르다 보니,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너를 보게 되고 그걸 고치려 하는 부모의 욕심으로 너를 혼내는 경험이 자꾸 쌓여간다. 왜 아직도 너는 그렇게 인사를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밥을 먹을 때에는 꼭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식사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식사를 못하고 왜 자꾸 일어나서 어디를 가는 거야? 왜 그렇게 주의가 산만한 거니? 등등.. 인사와 식사 예절은 나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람의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 이 부분만큼은 너에게 엄한 아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호되게 혼내고 네가 의기소침해지도록 다그치게 된다. 그런 나에게 배운 것일까.. 너의 대답은 소리치듯 "알았어!!!" 또는 "왜 그래!!!" 그렇지 않으면 울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너의 반응을 보면서 처음에는 기가 막히기도 했고, 오히려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더 크게 소리치고 강압적으로 몰아붙이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이는 분명 잘못된 훈육 방법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운 4살이 되면서 올바른 훈육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찰나였다.
그러던 중, 어느 일요일에 나는 참 좋은 방법을 찾아낸 것 같다. 우리 집은 모태 신앙으로 천주교를 믿는다. 그 덕에 방마다 천주교와 관련된 성물이 하나씩 있고, 안방에 있는 와이프의 화장대에는 성모마리아 고상이 하나 놓여 있다. 그날도 네가 무언가 잘못을 했고, 다그치다 지친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더 이상 소 귀에 경을 읽는 것 같은 방법으로는 너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현정아, 아빠 따라와봐, 같이 갈 데가 있어.”
혼내다 말고 너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갔다. 조그마한 의자를 안방에 있는 성모마리아 고상을 바라보며 두고 너를 앉혔다. 그리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빠의 기분이 좋지 않아. 현정이에게 실망스러워. 무엇 때문에 아빠가 그러는지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고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면 아빠한테 와서 알려줄래?”
너 혼자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래서 아빠가 화가 났는지 고민해 보라는 의도로 ‘생각하는 의자’에 너를 앉혔다. 근엄한 목소리로 조금은 어두운 어투로 이것은 분명 너를 혼내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줄 생각이었다. 부모와 떨어져 있는 시간,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나의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시간,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이 나름의 훈육을 위한 체벌의 하나로 작동하기를 조심스럽게 바랬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중요하다. 문제는 생각의 깊이이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 놓여있는 상황에 대하여 느낌이 있고 생각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깊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되어 보아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과 나를 바꿔보는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건성으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보다 나의 시각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생각이 강해진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은 오히려 나의 감정과 생각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만다. 그 순간 상대방과의 교감은 끝이 나고 얄팍한 이해의 수준이 나를 편협한 사람으로 만들고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 절하된다. 그래서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어떤 그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드러내는 강력한 무기가 되며 그것은 훈련으로 가다듬어질 것이라 믿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가 웃으며 방 밖으로 나온다. 과연 너는 벌을 받았다고 생각이나 했던 것일까?
"생각 다 했어"
하고 내 무릎에 와 앉아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근조근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근본적인 잘못을 깨우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지만, 둘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며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옳거니! 생각하는 의자란 이런 것 이구나!’, 너에게는 생각하는 의자가 있다. 너 스스로 앉아서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불현듯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은 누군가에게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화도 풀리니 아이스크림은 당연한 보상이며,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내 딸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