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궁금한 민지 Sep 03. 2020

성적 대상화에도 급이 있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

정윤수 감독의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 살구색 블라우스를 못 찾아서 비슷한 색상의 가디건을 입은 손예진으로.


타인의 시선을 끈다는 건 굉장한 일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당신에게 누군가가 ‘목련꽃 같다’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것은 이제 부적절한 성적 대상화로 여겨집니다.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하고, 뭘 모르는 분별력 떨어지는 아저씨나 하는 일로 여겨지죠. 한때 온라인에는 ‘시선 강간’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죠.


물론, 비지니스 미팅에서 섹슈얼한 암시를 던지는 말이나 몸짓을 하는 건 곤란합니다. 그러나 연인 또는 관심 있는 사람의 주의를 끄는 건 대단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도 된 마냥 상대의 시선을 호령하는 것은 분명 대단한 위력입니다. 세심한 자기관찰을 통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차림새를 알고, 이를 어울리는 몸짓과 함께 표현할 수 있는 이들만의 특권이죠.


성적 대상화는 두 주체간 한쪽으로 쏠린 권력 관계를 보여주기 좋습니다. 한쪽이 지닌 매력에 저항할 수 없을 때 특히 적합하죠. '나를 훑는 시선에서 살갗을 관통하는 자긍심을 느꼈다'라고 말하는 것과 '나의 시선은 경주마의 레일 마냥 그의 몸선을 쫓았다'라고 한다면, 어느 쪽에 더 힘의 무게가 실릴까요? 흔히 '팜므파탈'이 나오는 소설이 후자의 표현을 채택하는 것은 무너진 힘의 균형을 드러내기 더 적절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은 이국적 외모를 지닌 나오미에 매혹된 남성 조지의 이야기입니다. 1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로서, 양대 산맥인 주인공 나오미를 관찰하는 시선에 성적 대상화가 다분하죠. 나오미의 생각은 조지를 통해 어림짐작할 뿐입니다. 우리는 조지의 시선을 빌려 나오미의 외양을 그려보고, 그의 행동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관찰의 시점이야말로 나오미가 지닌 유혹의 힘을 방증하죠.




다니자키 준이치로, 『미친 사랑』, 김석희 옮김, 시공사, 2013


두 남녀의 동고동락 아니고 동거동락


소설 초입 전기회사에 다니는 스물여덟살 남성 조지는 카페 여급으로 일하는 15살 나오미를 집안에 들입니다. 그들이 동거하게 된 2층 짜리 양옥집은 그림 속에 있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공간이죠. 살림을 차리는 보금자리보다는 장난스런 소꿉장난에 더 어울립니다. 곧 <미친 사랑>은 두 남녀가 이 자그마한 세트장에서 동거동락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동고동락(同苦同樂)'이 아니라 '동거동락(同居同樂)'일까요?


‘동고동락’이 아닌 ‘동거동락’이라 쓴 것은, 주인공 조지가 결국 나오미를 아내로 맞긴 했지만, 애초에 그를 들인 계기가 삶의 반려라기보다는, 일상에 여흥을 더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소녀를 친구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그녀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밝고 명랑하게, 말하자면 놀이 같은 기분으로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은 정식으로 가정을 꾸리는 것과는 다른 각별한 재미가 있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p14)’ 따위의 심정이었으니까요.


나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척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생활을 꾸려가려는 진지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놀랍게도 1910년대 일본에는 지금 우리나라의 '배달의 민족'까진 아니더라도, 벌써 시켜 먹는 요릿집이 있더군요. 그는 이 같은 개화의 이기를 한껏 누려 끼니는 매번 주문해 먹을뿐더러 요요한 기운을 뿜는 옷감 사이에서 사부작거리며 거울 속 자신에게 도취되곤 합니다.





꽃이 화병을 갈아입다


소설은 조지가 나오미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대상화’가 주도하는 소설이죠. 조지의 눈에 입각해 나오미를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대상화는 남성 작가들의 편협한 전유문화로 여겨져 왔습니다. 도덕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성적 대상화가 욕을 먹는 이유에는 아름다운 여성을 꽃 외에 비유할 말을 모르는 문학적 게으름 탓일지도 모릅니다.


작가 준이치로의 시선은 그러나 한층 섬세합니다. 나오미와 조지는 주말마다 미쓰코시나 시라가야 백화점에서 나오미를 빛내줄 옷감을 찾아 헤맵니다. 덕분에 항상 집안에는 나오미가 입다벗은 옷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습니다. 놀랄 만한 비유는 여기서 이뤄집니다. 조지는 차마 외출복으로 입을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한 옷들을 실내에서 갈아치우는 나오미를 보며 ‘말하자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여러 꽃병에 번갈아 꽂아보는 것과 같은 심정(p58)'라고 표현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무릎을 치고 말았습니다. 흰 블라우스를 입은 나를 꽃에 비유할 수야 있지만, 목련에 비유하는 일은 한결 섬세한 시선이죠. 게다가 옷을 갈아입는 행위를 화병이 바뀌는 그림에 비유하는 사람은 더욱이 흔치 않을 겁니다. 이토록 꼼꼼한 시선으로 내 모습을 어여쁘게 봐주는 남자라면,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나오미는 콜롬비아 장미


한편 나오미는 현재 많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직각 어깨’와는 거리가 멉니다. 뼈대 대신 둥그스름한 곡선이 돋보이는 어깨거든요. 잘 여문 복숭아처럼 도톰하게 살집이 잡히는, 꽉 쥐면 터질 듯한 느낌을 주는 어깨랄까요. '두툼하고 듬직한 어깨와 호흡이 강해 보이는 가슴(p45)'이라고 전하는데, 단단하게 익은 천도복숭아가 생각났습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어깨를 묘사하는 부분이 오버랩 되더군요.


가득 여문 어깨를 지닌 나오미를 꽃에 비유한다면 어떤 꽃일까요. 분명 목련은 아닐 겁니다. 조지의 성적 대상화에 동참하자면, 나오미라는 꽃은 제멋에 기세 등등한 콜롬비아 장미를 닮았습니다. 몇 주 전 지하철 모퉁이에서 만난 꽃으로, 짙은 농도의 오렌지빛 몸통에 한 손 가득 채우는 큰 꽃망울이 화려했죠. 불로 그을린 듯 꽃잎 가장자리는 발갛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팽창하는 색감이라 더욱 그 기운에 압도됐던 기억이 나네요. 


한참 전 만나던 연인은 저더러 장미를 닮았다고 했습니다. 밋밋한 얼굴에 마른 몸을 지녔지만, 장미라고 하니 제 안의 다른 매력이 보이는 것만 같았죠.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에 대한 흥미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럽습니다. 오늘은 연인에게 어떤 꽃을 닮았냐고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꽃이 주는 이미지가 너무 멋쩍다면 동물도 좋겠네요. 


일상에서는 아무리 좋은 칭찬이더라도 남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건 피곤합니다. 때론 불쾌하기도 하죠. 사적으로도 온갖 되지도 않는 인간들이 몰려와 당신의 외모를 칭송하는 건 귀찮은 일일 겁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그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당신만의 고유한 매력을 발견해주는 사람과 만나세요. 적어도 흥미로운 연애를 하고 싶다면, 그냥 꽃 말고 어떤 꽃인지 봐주는 사람이 좋겠습니다. 그와의 연애가 뻔하진 않을 테니까요.

이전 07화 쾌락과 고통이 게임이 될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