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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Jul 29. 2021

이국의 뮤즈를 찾는 추격자들

 <엠마뉴엘>의 태국과 타히티로 간 고갱

본 적 없는 아름다움에 반하다


오늘도 낯선 아름다움에 반할 준비를 한 채 인스타그램 피드를 쓸어내립니다. 최근에 빠진 건 꽃인데요. 나비를 닮은 서양 난부터 조카의 스케치북에서 튀어나온 듯한 거베라까지 다양한 형태와 색감의 꽃으로 만든 꽃다발만 보면 하트를 누르기 바쁩니다. 그 가운데 단연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이케바나’인데요. 조형미가 돋보이는 일본식 꽃꽂이입니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완결성이 무너지는 것이 일본식 조경의 특징. 꽃과 줄기, 잎사귀 하나하나 관람자의 관점으로 세팅된 배치에 감탄이 나옵니다.


사람은 익숙한 대상을 좋게 여긴다고 하지만, 아름다움은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저처럼 생경한 아름다움을 좇는 움직임은 꾸준히 있어 왔으니까요. 제눈에는 동네 빌라 앞 고무 대야에 심긴 화초도 예쁘지만, 사막이나 열대우림에서 갓 옮겨온 듯한 비주얼의 식물에는 마음을 아예 뺏겨 버립니다. 타지는 그런 의미에서 매혹의 대상이 되는 가장 쉬운 조건입니다. 땅의 생태적 다름은 낯선 생김새를 만들고, 낯선 외양은 외지인의 눈길을 끌기 딱 좋으니까요.

Linh Le @Unsplash



<엠마뉴엘>의 방콕과 한 달 살이의 치앙마이


타지로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 좋습니다. 기차보단 배가 좋고, 배보단 비행기로 가는 게 좋습니다. 멀리 떨어진 미지의 지역일수록 여행 기분을 낼 수 있으니까요. 영화 감독 쥬스트 자캥(just jaekin)은 프랑스에서 비행기로 12시간 떨어진 태국을 배경으로 에로 영화를 촬영했는데요. 에로영화의 고전이 된  <엠마뉴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방콕으로 간 여성 엠마뉴엘입니다. 포스터에는 숏컷을 한 엠마뉴엘이 샤넬이 떠오르는 긴 진주 목걸이를 두른 채 라탄의자에 앉아있습니다. 이국성의 집합 그 자체죠. 프랑스인들에 비친 이국적 요소는 태국의 향취가 느껴지는 라탄 의자뿐이겠지만, 한국인인 제게는 유럽 여성이라는 레이어가 한 겹 더 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방콕 수완나품 공항(BKK)인데, 경유지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CDG), 출발지는 인천 국제공항(ICN)인 격이죠.


포스터 속 엠마뉴엘이 앉아있는 의자는 오늘날에도 ‘엠마뉴엘 체어’라 불리는데요. 그다지 낯선 비주얼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까지 ‘타지에서 한 달 살기’ 열풍이 뜨거웠고, 인도네시아 발리나 태국 치앙마이가 인기 체류지였으니까요. 그 덕분에 국내에는 라탄만 취급하는 소품샵도 늘어났습니다. 인테리어 플랫폼에는 태국이면 지천에 깔렸다는 몬스테라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죠. 동남아의 매력은 1970년대 프랑스나 2010년대 우리나라나 유효합니다.

쥬스트 자캥, <엠마뉴엘> 포스터



고갱이 타히티에서 기대한 것


이국성에 매료된 인물은 또 있습니다. 1903년 타히티에서 사망한 고갱이죠. ‘타히티의 여인들’이나 ‘마나오 투파파우’ 등 사후 그의 명성을 드높인 작품 상당수는 타히티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인데요. 그는 실제로 예술가들이 모인 만찬에서 자신이 프랑스를 떠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다고 해요. 서구 문명이 얼마나 허위에 차 있는지 강조하면서 자연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을 거라 선언했죠. 그때나 지금이나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일단 공표해야 한다는 법칙은 똑같나 봅니다.


그는 첫 타히티 여행에서 2년간 체류합니다. 고갱은 타히티의 매력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이미 유럽의 손길을 탄 도시 모습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기대했던’ 타히티의 원시성을 연출하는 데 매진합니다. 일례로 고갱의 십대 연인 테하나마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테하나마의 조상들’에는 상형문자가 표현돼 있는데요. 실상 이는 아무 뜻이 없다고 합니다.1) 낯선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일정 부분 연출된 이국성이 필요했죠.


내셔널 갤러리 도록의 기고자인 엘리자베스 차일드(Elizabeth Childs)는 이 그림에 대해 패션이나 액세서리를 이용해 태평양 섬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한 민속적 초상화(Ethno-portraits)라고 분석합니다. 2) 현실 속 요소를 그러모아 사실에 근접한 그림을 만든 거죠. 확실한 건 그가 빚어낸 원색적 색감과 이미지는 현재까지 사람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모은다는 겁니다. 예술성을 떠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이국성은 누구나 소비하기 좋은 요소이기도 하죠.


폴 고갱, ‘Spirit of the Dead Watching’ (1892) wikipedia



크로아티아에서 무궁화를 보지 않아도


타히티로 떠난 고갱이나 영화 <엠마뉴엘>에 매료된 관객이나 시선은 비슷해 보입니다. 새로운 자극을 줄 뮤즈를 좇는 벌의 눈빛이죠.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가 한 끗 차이인 것은 바로 이런 구조에 기인합니다. 자극을 뒤따르는 관찰자라는 신분이 동일하니까요.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에로틱 필름 속 주체는 상대에게 급습당하고, 끌려다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포르노에선 일절 일어나지 않는 일이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의 눈은 추격자의 시선을 띱니다. 이들의 시선은 언제나 지금 이곳이 아닌, 가보지 않은 곳을 헤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익숙해지면 그만입니다. 낯선 광채를 잃어버리죠. 이때 아름다움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처한 상황에 따른 것입니다. 이국성의 이 같은 아이러니를 체감하는 순간은 낯선 곳에서 익숙한 대상을 만날 때인데요.


김소연 시인은 산문집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에서 크로아티아에서 무궁화를 보고 감탄하는 이를 보고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옆 사람은 이국의 땅에서 처음 만난 무궁화를 잊지 못하여,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살아가게 될 수도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사람이 부러웠다. 이런 식으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아채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좋아할 수 있던 것들을 무시했던 적도 얼마나 많았을까. 좋아했던 것을 과연 좋아하기나 했을까. 싫어했던 것들도 과연 싫어하기나 했을까. 그녀는 자신이 겪어온 애호의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재구성하고 싶어졌다.(p50) 3)


여전히 저는 낯선 아름다움을 찾아 헤맬 겁니다. 당장 이케바나부터 배우러 갈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조금은 내 주위에서 에로틱한 감흥을 발굴하는 눈을 가지려 합니다. 태국의 엠마뉴엘과 타히티의 여성들, 모두 좋지만 당장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보다 똑똑한 광부는 없겠죠. 여행이 어려워진 지금이라면 더욱요. 이국의 땅으로 향하지 않아도 ‘지금 여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건, 삶을 가물지 않게 하는 힘이니까요.


Tuva Mathilde Løland @Unsplash






*인용자료

1) Gauguin’s ‘strange, beautiful and exploitative’ portraits, Billy Williams, BBC, Oct 21st 2019 (https://www.bbc.com/culture/article/20191017-gauguins-strange-beautiful-and-exploitative-portraits)

2) Gauguin’s Tahitian lover may be more fantasy than reality, Martin Bailey, THE ART NEWSPAPER, Oct 7th, 2019 (https://www.theartnewspaper.com/news/gauguin-s-lover-may-be-more-fantasy-than-reality)

3)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크로아티아와 무궁화’, 문학과지성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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