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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Jan 31. 2021

쾌락과 고통이 게임이 될 때

<피아니스트> 에리카와 <세크리터리> 리에게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10월, 가을의 노래를
함께 들으시길 추천합니다.
BGM | Tchaikovsky, Seasons op.37 - October Claudio Baraviera & Vera Anasova

    https://youtu.be/nbm-hrD4XpU




쾌락을 느끼면서 우는 마음


섹스를 하면서 운 적이 있나요? 저는 평범하게 자랐습니다. 보수적인 한국 집안의 첫째 딸이라는 특수성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가정환경이었죠. 아무튼 섹스에 트라우마가 생길 일은 없었죠. 그럼에도 섹스는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쾌활하게 관계를 나누다가도 후드득 눈물이 떨어지곤 했으니까요. 연쇄적인 핵분열처럼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스스로도 까닭을 몰라 부끄러운 마음에 베개에 얼굴을 묻곤 했죠. 확실한 건 섹스가 제때 토해내지 못한 감정들을 보기 좋게 터뜨려주는 행위였다는 겁니다.


이상하게도 많은 영화에는 심리적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치환하려는 여성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영화 <세크리터리>의 주인공은 길고 아름다운 목선을 지녔지만, 경직된 채 올라가 있는 어깨 덕에 초라해 보입니다. 마치 겨드랑이에 종이라도 몇 장 껴둔 듯한 포즈죠. 그녀는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질식할 듯한 갑갑함을 느낍니다. 그때마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장비함을 엽니다. 그곳엔 다양한 형태의 칼날이 가지런히 꽂혀 있죠. 그녀의 심리적 고통을 잠재워줄 도구들이죠.

비슷한 영화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엄마와 딸 사이의 집착적인 관계가 똑같습니다. 이쪽은 더 입체적입니다. 대개의 폭력적인 가족 관계가 그렇듯 주인공 에리카와 그녀의 엄마는 정신 나간 싸움 직후 갑자기 눈물바다가 돼 얼싸안는 행위를 반복하죠. 그 사이에는 화장실에서 자신의 외음부에 상처를 내는 에리카가 있습니다. 에리카와 리의 공통점은 자신을 해친다는 점입니다. 리는 강박적인 완벽함을 지닌 상사에게 일부러 업무에 허점을 보여 자신을 괴롭혀 달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에리카는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학생에게 피학적인 욕구를 담은 편지를 전하죠.


영화 <세크리터리> (2002) imdb.com
영화 <피아니스트> (2001), 네이버영화




쾌락의 매뉴얼, 고통의 매뉴얼


몇 달 전 <부지런한 사랑>을 낸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그는 “사탕을 자기식대로 음미하는 과정에 대해 진짜 자세하게 써오는 친구”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더라도 자신을 확실하게 행복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요. 이슬아 작가는 이를 “쾌락의 매뉴얼”이라 이름 붙입니다.1) 정말 우리들은 자신만의 쾌락의 매뉴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도 인생을 살아오며 제 나름대로 체득해 왔죠.

영화 속 그녀들은 부모와의 어긋난 관계로 생긴 고통을 스스로에게 분출합니다. 나아가서는 타인에게 맞거나, 성인 비디오 가게에서 휴지통을 뒤져 누군가가 쓰고 버린 휴지 냄새를 맡으면서 피폐한 마음을 수습합니다. 에리카와 리는 자신을 내동댕이치고 싶은 욕망에 몸을 떱니다. 이들에게 성욕은 고통과 쾌락이 얽힌 채 똬리처럼 병존합니다. 상처를 가하고, 상처가 짓무르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을 찾죠. 그녀들에게 고통을 지우는 방법은 곧 쾌락의 매뉴얼이기도 합니다.

감히 짐작하건대, 누구도 성애에서 고통과 쾌락을 명징하게 나눌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섹스 이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갈비뼈와 등 근육이 뻐근하고, 하반신 깊숙한 곳의 근육이 아린 느낌에서 은밀한 희열을 느낍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오랫동안 같은 선상에 있었습니다. ‘고통 끝에 낙이 온다’라는 말이 있죠. 이런 관념은 고통 속에서도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합니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고통은 곧 쾌락이고, 쾌락은 또 고통입니다.

 

영화 <세크리터리> (2002) imdb.com
영화 <피아니스트> (2001), 네이버영화




섹스 게임 대신 너절한 사랑을


에리카와 리, 그녀들은 자신 안에 잔존하는 고통을 상대의 손에 떠맡깁니다. 그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세계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던져줍니다. 고통을 게임처럼 만들어 룰을 따르도록 요구하죠. 프레임 속의 고통은 쾌락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처럼요. 하지만 내 몸이 직접 연루된 기억이라면 가능할까요. 상처는 SM 게임 따위로 잊힐 수 없습니다. 상처를 피가학적인 섹스 게임으로 가리려는 건 가장무도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체적 고통이 쾌락으로 승화될 순 있어도, 마음의 상처가 쾌락으로 승화될 순 없습니다.


최적의 처방은 사랑입니다. 물론 사랑이라고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닙니다.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해와 바람」 속 해의 이야기처럼 온화하지만은 않습니다. 내면의 상처를 들춘다는 점에서 때론 무례하기까지 하죠. 물론 성숙한 어른이라면 서로의 상처를 문진표에 적고 들여다보며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고 보듬을 겁니다.  하지만 사랑의 많은 장면은 서로 경계를 모르고 뛰노는 연인들을 담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자아는 무너지고, 파편처럼 부서진 자아의 조각을 말없이 주워 담는 풍경에 가까울 테죠. 


사랑의 풍경은 너절합니다. 하지만 “반대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런 완충장치도 없이 우리 자신에게로 추락”합니다. 2) <세크리터리>의 리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 준 상사를 통해 자기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반면 <피아니스트>의 에리카는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발터와의 관계에 처절하게 실패하죠. 하지만 에리카는 이제 알았을 겁니다. 게임이 자신을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요.


분명 섹스는 메스처럼 당신의 상처를 정확히 열어 젖힙니다. 하지만 그뿐이죠. 피가 뚝뚝 흐르는 병변을 걷어내고 이를 봉합하는 건 섹스의 역할이 아니라, 마음의 몫입니다. 타인의 몸에 내 몸을 던지기 전 웅크린 자아를 먼저 꺼내주세요. 마음 먼저, 섹스는 나중에. 게임의 탈을 벗은 사랑만이 섹스에서 고통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습니다. 섹스가 주는 쾌락에 온전히 몰입하고 싶다면 옷 말고 마음의 갑피부터 벗어주세요. 내 안의 처연한 잔해를 쓸고 닦을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 사랑이니까요. 


영화 <피아니스트> (2001), 네이버영화







*인용 자료

1) "잘 하지 못해도 좋아하는 것, 그것도 재능", 오마이뉴스, 2020.11.3 http://naver.me/FxzmjJQa
2) 한병철 ‘타자의 추방’, 이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 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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