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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Feb 28. 2021

밥도 비벼먹을 수 있는 겨드랑이라니

페티쉬에 사로잡힌 사람들

겨드랑이의 생각지도 못한 위상


오늘은 한참 전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고 의아했던 경험으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날그날 미모 포텐을 터뜨린 여자 아이돌의 사진이 많이 올라오는 남초 커뮤니티였는데요. 열정적으로 무대에서 춤을 추는 여자 아이돌의 사진 한 장과 한 줄 문장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뽀얀 겨드랑이 핥고 싶다’.

겨드랑이라니. 제게 겨드랑이란 관리의 영역에 불과했습니다. 교복에서 벗어난 스무 살 이후부터 ‘민소매를 입고 싶다면 제모해야 하는 곳’ 혹은 ‘여름에 회색 티를 입을 수 없는 이유’와 등식인 부위였죠. 계절성 주의를 요하는 특수 부위로서, 시각과 후각적 정렬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곳 정도로요.

아무리 예쁜 아이돌이라도 겨드랑이에 대한 흥분은 제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분명 모공도 있을 테고, 샤프심처럼 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조금만 활동해도 체취를 발산하는 곳인데. 알코올로 뽀득뽀득 닦아낸, 체취가 소거된 겨드랑이를 상상하는 것인가, 은은한 체취까지 품겠다는 것인가, 진정 궁금했죠.

그러고 보면 각종 명화 속 여성들의 포즈가 떠오르는데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한쪽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나게 팔을 올린 포즈가 많죠. 연예인이든 명화든, 어느 쪽에 이입해 봐도 저로서는 겨드랑이에 욕망을 대입하긴 어려웠습니다. 팔과 몸통을 잇는 경계 부위라 평소 안 보이기 때문인 것일까, 추측할 따름이었죠. 

겨드랑이, 하면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영화 <색,계>의 탕웨이



두상이 없을 뿐이지 안 될 건 또 무어냐


겨드랑이에 느끼는 흥분은 일종의 페티시즘에 가깝습니다. ‘페티시즘’의 사전적 의미는 생식 활동과 무관한 신체 일부나 분비물, 타인이 벗어둔 의복 등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인데요. 최근 펭귄 클래식에서 출간한 기 드 모파상의 <어떤 정염: 모빠상 단편집> 중 페티시즘을 다룬 귀한 소설 한 편을 만났습니다.

대충 시체 애호에 관한 스토리인데, 한국어로 '머리채'라는 소설입니다. 번역하니 좀 끔찍하네요. 소설의 주인공은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를 지닌 남성으로, 오래된 사물이 갖는 시간의 흔적에 대해 열광하는 사람이죠. 어느 날 그는 17세기 이탈리아 가구를 구매하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금발 머리채를 발견합니다. 이후 그는 말 그대로 그 머리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나는 머리채를 나의 피부로 느끼고, 입술을 그것 속에 깊숙이 처박아 입맞춤하고 경련하듯 깨물기 위하여, 나 홀로 침실에 처박히곤 하였다. 그것으로 나의 얼굴을 휘감는가 하면, 그것을 마시듯 입속으로 흡입하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노란 햇빛을 보기 위하여 눈을 그것의 황금빛 물결 속에 담그기도 하였다. (p63)


처음엔 징그럽게 느껴졌는데 금세 적응이 되더군요. 현실에서도 직접적인 성기 접촉만 성적 흥분을 유발하진 않으니까요. 겨드랑이도 있고, 발도 있는데, 머리채가 어색할   무어냐 싶었죠. 페티쉬의 다른 표현은 ‘partialism’. 그런 면에서 소설 속 주인공이 느끼는 머리채에 대한 성적 흥분은 원형적인 성격의 페티쉬에 가깝습니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 <목걸이> 등을 즐거이 읽으셨다면 역시 추천합니다.



가슴 페티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


가슴을 페티쉬에서 빼놓으면 또 서운하죠. 페티쉬의 다른 조건은 ‘생식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인데요. 그런 측면에서 가슴은 애매합니다. 아이를 낳진 않지만, 아이를 먹일 수는 있으니까요. 페티쉬 영역에 넣기엔 꽤 생산적이죠. 가슴을 떠올리면 스페인 영화감독 비가스 루나의 <달과 꼭지>가 떠오르는데요.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유를 멀리서 받아먹는 9살 소년 테테의 표정이 인상적인 있는 영화죠. 

<달과 꼭지>의 테테는 갓 태어난 동생에게 빼앗긴 엄마의 가슴을 대체할 자기만의 젖가슴을 꿈꾸는 소년입니다. 이 영화는 가슴을 노골적으로 탐닉하는 포르노적 시선과 달리 소년을 화자로 삼음으로써 음흉함의 혐의를 빗겨갑니다. 에로틱한 요소들을 소년의 시선으로 천진하게 그려냄으로써 특유의 아름다움을 완성하죠. 


영화에는 저마다 페티쉬를 지닌 인물들이 나오죠. 방귀로 서커스를 해 먹고사는 모리스와 발가락에 집착하는 에스트레이따 등 귀여운 캐릭터가 가득합니다. 페티쉬는 유난히 스펙트럼이 넓은 영역입니다. 발 페티쉬처럼 비교적 무난한 케이스도 있지만, 가슴부터 머리채, 겨드랑이, 나아가 신다 벗은 양말까지 다양하죠. 한 마디로 ‘각자의 흥분’. 페티쉬가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비가스 루나 감독의 <달과 꼭지>. 욕망들을 음란하게 바라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낸 접근이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이쯤에서 모파상의 소설 ‘머리채’로 돌아가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소설은 머리채에 사로잡힌 남성을 진찰하는 의사가 ‘나’에게 문제의 머리채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나는데요. ‘나’는 의사가 건넨 머리채를 보자 혐오감과 욕망이 한데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의사는 그런 ‘나’를 보고 한마디 덧붙이죠. “인간의 생각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습니다.”(p66)

분리된 신체 일부를 보고도 흥분을 느낄 수 있다니, 인간이란 참 기이한 존재입니다. 페티쉬를 다시 검색하니 또 겨드랑이입니다. ‘밥도 비벼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하얀 겨드랑이’. 핥는 것도 부족해 밥까지 비벼먹다니. 그렇다면 전 갓 이발한 까끌한 남성의 목덜미를 꼽고 가겠습니다. 이쯤에서 당신의 페티쉬를 떠올리지 않으면 반칙입니다. 지금 당신 입술을 달싹이게 한, 당신의 페티쉬는 무엇인가요?






*인용

기 드 모빠상, <어떤 정념: 모빠상 단편집>, 이형식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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