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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Jul 28. 2020

'너는 참 좋겠다?', '내가?!'

오래 묵어 습관화된 감정은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

‘너는 좋겠다. -해서.’
 ‘너는 요즘 단물 빨고 있겠구나?’     

메시지를 보고도 선뜻 대답을 하기 망설여지는 카카오톡 내용이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망설여지고 머쓱해져서 대강 둘러대고는 다른 화제를 꺼낸다. 친구는 별생각 없이 하는 소리고 그동안도 몇 번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망설여졌다고 썼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떤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어디서 그런 ‘불편함’이 비롯된 것인지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인터넷에서 ‘친구의 ㅇㅇㅇ에 기분이 나쁜 저, 예민한 건가요?’라는 제목과 사연이 있고 그 아래로 답이 줄줄이 달린  캡처본을 본 적이 있다. 내 사연을 적어 놓으면 ‘응 니가 예민~/님이 이상해요/사연자는 참 피곤한 성격이네요. 친구 하기 싫을 듯ㅎ’ 이런 종류의 댓글이 달릴 것 같았다. 내 감정을 놓고 떠오르는 이유들을 여러 가지 적어보았다.     


‘친구는 좋겠다고 했지만 현재의 내 상황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아서?’, ‘열심히 바쁘게 살아야 하고 편한 시간을 보내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어서?’, ‘‘응 지금 나는 참 좋아.’라고 대답하면 몸을 숨기고 있는 불행이 불쑥 나타나 삶을 망가뜨릴까 봐?’, ‘삶의 다양한 면면을 어떻게 행복 또는 불행이라는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는 철학적 이유 때문에?’, ‘도리어 친구가 다 가졌는데 나한테 이런 말을 하니 시기심이 일어서?’ 보통 메모지에 생각을 나열하면 좀 정리가 되는데 내 진짜 마음을 도통 알 수 없었다.      


브런치 글을 적으며 생각하니 나는 편하면 안 되고, 행복감을 느끼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있는 게 큰 이유 같았다. 그동안의 내 삶에 비하면 그나마 지금은 그나마 숨통을 트고 사는 편인 것은 맞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했고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정을 느낀다. 인생이 좀 빤하다 싶으면 어떤 복병이 내 뒤통수를 쳐 삶을 망가뜨릴지 불안을 안고 산다. 더 깊이 생각을 해보니 나는 현재 내가 누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은 죄책감이 핵심감정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무의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죄책감’이란 녀석은 내 삶을 참 오래도 망가뜨렸다. 사춘기 시절 내가 반항을 하면 어머니는 종교 계율을 들이대셨고 성인이 되어 특정 종교기관에서 받은 철저한 교육이 상황을 더 악화시킨 건 맞지만 죄책감이란 감정은 훨씬 그 이전부터 나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내가 손해를 보고서도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학생 때도 그렇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어쩌다 내게 편한 역할이 주어지면 그 이 끝날 때까지 매 순간이 바늘방석 같이 느껴졌다.  죄책감은 어쩌다 음식을 많이 하면 꾸역꾸역 탈이 나도록 먹거나 남은 음식을 함께 해치워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불만스러운 마음이 생기게 했고, 여윳돈이 생겨도 소비를 하지 못하게 했다. 내면에서는 만성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고, 현재를 즐기지 못하게 하는 원흉이 되었다.     


이렇게 글을 적고 나서도 ‘너 요즘 정말 편하구나?’하는 친구의 말에 ‘응 나 좋아. 부럽지?’라고 너스레를 떨며 대답하지는 못할 거 같다. 지금도 마음 한편에서는 ‘너 지금 진짜 답 없는 거 맞는데 착한 척하려고 ‘죄책감’이라는 핑계를 대는 거지?’라는 목소리가 들려다. 참 오래된, 끈질긴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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