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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04. 2024

재능력자_4

의뢰의 시작

이후로 연애는 쉬면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데 집중했어. 뭘 만들든, 돈을 벌든 감정 소모보다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지. 학벌이 썩 뛰어난 건 아니라서 재능을 활용한 일자리를 생각하기 시작했어. 재능이 즉시 부로 환산 가능하다면 사는 데 걱정이 없을 것 같아.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까 재능을 어떻게 써먹어 볼까 생각하다가 온라인에 흥신소를 차렸어. 


그냥 간단해. 상담소라는 이름의 온라인 카페를 만들고 익명 사연을 올리는 코너를 만들어두고 안내 문구를 적어놨지.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을 땐 의뢰가 가능하다고, 비용은 별도 문의. 이런 건 입소문이 잘도 나더라고. 기를 쓰고 홍보하지 않아도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의뢰가 들어왔어.


의뢰는 너무나 뻔하게도 외도 확인이 가장 많았어. 배우자나 연인이 외도하는 것 같은데 물증을 잡기가 어려울 때 의뢰를 하는 거지. 그러면 의뢰 대상의 일상을 쫓기 시작해. 너무 티 나면 안 되니까 옷은 최대한 수수하게 입고 타인의 삶을 따라 걷는 거야. 열심히 따라다니면 반드시 틈이 보여. 사람이 공중에 붕 떠서 홀로 살아가지 않는 한 어딘가에 세포를 떨어낼 수밖에 없거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A4 용지에 손이 베였을 때, 사무실에서 신는 슬리퍼나 신발에 남아있던 각질, 카페에서 미팅이나 대화 후 계산대로 갖다 주는 다 마신 음료컵 등등. 중요한 건 세포를 움켜쥘 때 걸리지 않는 거야. 그렇게 열심히 세포를 수집하면 의뢰 대상의 감정과 기억이 어느 정도의 줄거리를 만들어내지.


‘오늘 퇴근하고 미정이네 들렀다가 집에 가면 한 열 시쯤 되겠지. 야근 핑계 너무 많이 댔는데 오늘은 뭐라고 말할까.’

‘와이프 좀 피하고 싶은데 늦게 들어갈까. 전에 만났던 걔한테 연락해 볼까.’

‘애들 하원 전에 빨리 다녀와야지. 새로 산 속옷 오늘 개봉이다!’

외도인 줄 알았는데 외도가 아닌 경우도 많았지.

‘이번 달 마통 못 막았는데 걸릴까 봐 불안해. 집에 가기 싫어.’

‘아빠는 무슨 유언장을 이렇게 오래 고쳐. 공증 전에 내 손에 들어와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되는 거야.’

‘동성애자인 거 안 걸리려면 지금 얘 계속 만나야 해. 그게 최선이야. 하, 지겨워. 밥은 뭐 먹지? 설마 모텔 가자고 하는 거 아니겠지.’


어쩌다 운이 좋으면 사진 같은 증거도 넘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어. 그래서 증거를 만드는 흥신소에 비해 수익은 좋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재능이 제 몫을 해준 일이었지. 


그렇게라도 이 재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억울할 것 같은 감정도 물론 있었어. 가끔 위태위태했거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혹시 이 재능이 없어지진 않았을까. 하룻밤 꿈이면 어쩌나. 젊은 시절 잠시 스쳐가는 재능이면 어쩌나. 그런 마음. 내가 아무리 찌꺼기스러운 재능이라고 했다지만, 그래도 이건 엄연한 내 것이라는 인지가 있었어. 이 우스운 재능을 잃고 싶지는 않더라고. 아무리 남이 먹던 음료에 손을 대고 남이 사용한 치실을 잇몸에 갖다 대더라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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