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살찐 나, 마르지 않은 나, 통통한 나는 바로 우울하지 않은 나다.
내 몸은 아주 정직하다. 들어가고 나오는 게 명확하다. 오차가 없다. 다시 말해 먹는 만큼 정직하게 찐다. 물만 먹어도 찐다는 비굴한 변명은 하지 않겠다. 인정해야 한다. 나는 먹는 만큼 그대로 살이 찌는 정직한 체질이다. 그리고 나는 잘 먹는다. 하루 세끼 제때 먹어야 하고, 새 모이만큼 먹고는 견디지 못한다. 그 결과는 상상에 맡기겠다.
그런데 이번에 우울증이 재발하면서 살이 빠졌다. 병원에 방문하기 직전까지 2주 사이에 4kg이 빠졌다. 식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여행을 가서는 온종일 주스 한 병으로 때울 정도로 식욕이 없었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렇게 빼려고 애쓸 때는 1kg도 안 빠지더니, 정작 건강이 버텨줘야 할 시기에는 의도와 관계없이 체중이 술술 빠져나갔다.
병원에서는 이렇게 짧은 기간에 체중이 빠지는 건 위험하다고 힘들어도 규칙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러 다이어트를 하는 게 아니라면 평소 좋아하던 음식으로 식사를 꼭 하라고 했다. 평소 좋아하던 음식이야 책으로 쓰고도 남을 만큼 많았지만, 당시에는 음식을 넘기는 게 곤욕이었다.
매일 먹어도 좋았던 생선회, 주기적으로 먹지 않으면 속이 허한 떡볶이, 파삭 소리를 내며 입안으로 돌진하는 소금빵, 단골 식당의 구운 배추 샐러드, 매콤한 칠리라이스, 부드러운 카페라테, 쌈채소 여러 겹에 얹어 먹는 삼겹살... 어떤 음식을 내와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살이 빠져서 좋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진 않았다. 옷이 커진 건 편해서 좋았다. 그런데 못 먹어서 살이 빠지니 모양이 흉했다. 피부가 구겨진 신문지처럼 까칠거렸고 한눈에 메마른 모래처럼 푸석했다. 어쩐지 머리도 휑한 느낌이 들고 먹은 게 없으니 체력이 없어서 조금만 걸어도 힘겨웠다.
평소엔 어떻게든 1kg이라도 떼어내고 싶었던 살들이니 빠지면 기뻐해야 하는 데 그리 기쁘진 않았다. 미운 군살더미 내 몸이라도 탈 없이 건강했던 때가 좋았다. 먹는 대로 잘 소화돼서 쿨쿨 잘 자던 시절의 나. 동그랗게 배가 나오고 얼굴이 통실해도 메마른 사막보다 시원한 오아시스가 좋듯이, 건강한 시절의 내 몸이 좋았다.
교토여행에서 주스로 연명하다 집에 돌아오니 살이 조금 더 빠져있었고 총 5kg이 빠졌다. 이때부터는 의식적으로 잘 챙겨 먹으려 애썼다. 만사 귀찮고 넘기기 힘들고 식탁에서 툭하면 우는 한이 있어도 식사를 거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깨진 그릇을 고치려면 영양분이 필요하다. 대신 입맛이 없으니 평소보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었다. 채소 비중이 적고 염분이 높아서 피하던 배달음식을 살면서 가장 자주 먹은 시기이기도 하다.
혼자 있으면 더 식사하기 싫어해서 남편이 퇴근 후 약속을 잡지 않고 집으로 바로 와 내 식사를 챙겼다. 1인분을 먹기 힘들어 0.5인분을 겨우 먹고 나면 남편이 한 입만 더 먹자고 달랬다. 그렇게 조금 더 식사하고 힘든 몸을 끌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평소 식사 후엔 남편과 산책을 나가 동네 한 바퀴 도는 게 즐거움이었는데 걸을 마음도 힘도 솟아나질 않았다.
그렇게 식사를 잘 챙기고 우울증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은 지 6주 정도 넘어가면서부터 신기하게도 식욕은 새싹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마 약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마음가짐과 다짐만으로 식사를 잘 해내고 건강해질 수 있다면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섭식장애를 경험할 리 없다.
우울증 약은 4~6주 정도 적응기가 필요하다. 적응기가 올 때까지 심신이 통제되지 않아 가장 힘든 시기다. 나는 약 복용 6주 차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식사할 의지가 생겼고 1인분의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복용 4개월 차인 지금의 나는 빠졌던 5kg이 화려하게 복귀한 것은 물론, 활동량이 줄어드는 겨울을 맞이하며 2kg이 더 증가해 아주 오동통한 몸을 갖게 됐다. 20대 때 급격한 다이어트를 한 이후 사는 내내 살찔 걱정을 달고 살았던 내가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은 것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건 다시 통통해진 내 몸이 밉지 않다는 점이다. SNS에 과시할 만한 날씬하고 마른 몸이 아니더라도 내 몸이 좋아졌다. 배가 조금 나오고, 등에 군살도 생기고, 팔뚝이 튼실하게 생겼어도 그 몸이 건강의 증거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몸무게가 늘고, 무언가 먹고 싶은 욕망도 생겼다는 건 우울증 환자에게 축복이다.
대개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 살이 빠지거나 찐다는데, 쪘다는 후기가 더 많다. 항우울제를 오랫동안 복용한 사람의 25% 정도가 체중 증가를 겪는다고 한다. 내가 기존 몸무게보다 2kg이 늘어난 건 약의 영향일 수도 있고 우울감이 해소되면서 식욕이 돌아와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식사량을 줄이고 혹독한 다이어트를 하고 싶진 않다. 평소 1kg만 늘면 며칠간 푸성귀만 먹고 무릎이 시리도록 운동하곤 했다. 하지만 우울증으로 인한 섭식장애를 이겨내고 다시 살이 오른 몸은 건강의 증거이기에 조금 자랑스러워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살찐 나, 마르지 않은 나, 통통한 나는 바로 우울하지 않은 나다. 마르지 않아도 우울하지 않은 내가 훨씬 사랑스러운 건 뿌듯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