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조손-여름은 포도호랑이의 계절

돼지촉의 비밀은 할머니?

by 막뚱이


여름은 포도호랑이의 계절이다. 나는 여름 과일을 특히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복숭아와 포도가 최애다. 닭(=언니)은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과일들은 거의 내 차지인데, 순식간에 포도 한 송이를 격파한 내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껄껄 웃으시며 ‘포도호랑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셨다. 가끔 시장에서 포도를 사 오실 땐, ‘막뚱이가 포도호랑이라 사 왔다’고 하시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께서 시장에서 주로 사 오시는 포도는 껍질째 먹는, 껍질과 알맹이가 분리되지 않는 포도라는 것. 할머니, 나는 껍질이 벗겨지는 한국식 포도(켐벨포도)를 좋아해…


올해 포도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올여름 첫 포도를 드디어 집에서 맛볼 수 있었다. 그것도 껍질을 벗겨서 먹는 한국식 포도! 나는 아주 친한 사람들에겐 비밀을 털어놓듯 내 촉이 좋다고 말하곤 하는데, 1) 앞으로 먹게 될 음식을 예견한 것이거나 2) ‘시크릿’의 법칙처럼 내가 먹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음식들을 끌어당기거나 3) 단순히 우연이거나. 어느 이유든지 내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말한 것은 일주일 이내에 먹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생 때부터 이런 신기한 경험이 시작됐는데, 예를 들어 쌀국수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면, 머지않아 쌀국수를 먹게 된다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냥 촉도 아닌 ‘돼(지)촉’이다.


이번 포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은 “우리 집은 포도 언제 먹어? 포도 먹고 싶다!”라면서 포도호랑이송을 불렀는데, 바로 다음 날 집에도 포도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올여름 첫 포도가. 웬 포도인가 했더니, 동네에 포도를 기르는 집이 있는데, 마을회관에 수확한 포도를 몇 송이 갖고 오셨고, 할머니가 내 생각이 나서 먹고 남은 걸 챙겨 오셨다고 한다. 이렇게 밝혀지는 내 ‘먹촉’의 정체는 결국 할머니였던 것인가. 배고프다는 단어처럼 내가 별생각 없이 뱉은 말들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 잊지 않고 챙겨주신 것. 우주의 법칙이라기보단 할머니의 법칙이었던 것인가, 수년간 믿어 왔던 믿음 체계가 혼란에 빠졌지만, 어찌 됐든 포도호랑이의 시즌이 찾아와서 기쁘다.


별명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어쩌다 한 번 별명이 붙여지게 되면, 그 명성에 부합하도록 조금은 호들갑 떨어야 한다. 이번에도 포도호랑이의 명성에 금 가지 않도록 열심히 포도 먹방을 찍었고, 할머니는 깨끗이 클리어한 걸 보며 아주 기뻐하셨다. (참고로 무엇인가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할머니에게는. 아는 동생은 치킨 껍질을 좋아한다고 했다가, 닭 껍질이 가득 담긴 닭죽 그릇을 받게 되기도 했다. 물에 빠진 닭이 아니라 기름에 튀긴 닭인데! feat. 집으로)


결론은 어떤 법칙이든 좋다. 우주의 기운이든, 할머니의 정성이든, 어떤 것이든 행복으로 이끄니까. 별 거 아닌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무미건조한 일상에 활력을 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은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현실을 하나씩 깨달아가는 슬픈 과정 속에서도 실은 ‘내가 마법소녀?’ 같은 그런 두근거림을 간직하는 것은 어른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일탈이다.


에필로그

여러분들은 자기만의 법칙이 있나요? 먹깨비 법칙 등. 한 친구는 몇 시에 일어날지 마음속으로 몇 번 세기만 하면 알람 없이도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부러운 능력. 알고 보면 우리 모두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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