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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뚱이 Oct 09. 2023

오손조손 여행기 - 여수 여행기 1

폭우 속에 시작된 여행과 우여곡절

이번 여수 여행은 2박 3일이었다. 날짜를 변경할 수 없어서 비가 왕창 쏟아지던 지독한 장마 중 강행군. KTX도 천천히 달렸던 날. 숙소에 오자마자 TV에서 보도되는 폭우 피해들을 보며 할머니는 내내 속상해하셨다. 더는 못 보겠다며 TV를 결국 끄라고 하실 정도로. 그렇게 지독한 올해 장마 중이었지만, 장마 끝물이어서 다행히 여행 이틀 차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고, 중간중간 느린 거북이 같은 소소한 여행을 이어나갔다.


‘무리하지 않는 여행’. 할머니와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행을 하는 중에도 꼭 명심해야 하는 사항이다. 나만 해도 체력이 전과  같지 않다는 걸 매년 느끼는데, 할머니는 가만히 있어도 허리가 아픈 노인. 최대한 걷지 않는 여행 일정을 짜야한다. 내 기준이 아닌 할머니의 기준에 맞춰 가동 범위를 줄이다 보면 빼기의 여행이 된다. 최대한 덜어 내는 미니멀 여행이 되는 것이다. 어르신들과 여행할 때 이동수단으론 자가용이 최고겠지만, 뚜벅이 특성상 큰 이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나머지 구간은 동선을 최대한 잘 짜서(카페는 무조건 식당 옆에 있는 곳으로) 평소엔 잘 안 타는 택시를 탄다. (이때도 닭카가 있긴 했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직 관내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ㅎㅎ) 평소에 잘 안 타는 택시지만, 비 오고 짐 많은 날 만나게 되는 택시처럼, 할머니와의 여행에서 택시는 정말 단비 같은 존재이다. 돈을 지불하며 타는 택시지만, 늘 감사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와 한 여행을 생각하면 택시를 탔을 때 장면이 꼭 떠오른다. 택시 기사님과의 대화 같은 것들. 다행히 여행 중 택시를 탔을 때 기분이 상했던 적은 잘 없는데, 다만 이번 여행에선 내 실수로 진땀을 빼야 했다.


첫날에 기차역에서 식당까지, 식당에서 숙소까지 이렇게 두 번에 거쳐 택시를 타야 했다. 할머니의 여수 이야기를 식당 가는 택시 안에서 들을 수 있었고, 여수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웨이팅 어플까지 처음 써가며 조금 기다린 끝에 함께 게장과 갈치조림을 맛있게 먹었다. 할머니도 맛있게 드셨고, 배 두드리며 나올 정도로 든든하게 먹은 후,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정신없이 카카오택시를 불러서 호텔로 갔다. 그런데…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풍경이 너무 익숙했다. 긴가민가하면서 택시에 내렸는데, 익숙한 풍경이지만 사진으로 봤던 그 호텔이 아니었다. 알고 봤더니 몇 달 전 회사 동기들과 함께 갔던 여수 숙소 이름을 도착지로 잘못 입력해 택시를 호출했던 것. 이름이 정말 비슷해서 그런지 무의식에 잠들어있던 숙소 이름이 소환되었던 것이다.(이건 기억력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다시 알고 봤더니 식당에서 예약한 호텔까지의 거리는 정말 가까웠고, 내가 잘못 입력한 숙소는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다시 호텔까지 가려면 비용이 꽤나 드는 상황이었다.


이걸 ‘멍청 비용’이라고 다들 하지 않나. 어이없는 실수로 돈을 배로 쓰게 된 것. 설상가상으로 비가 엄청 쏟아졌고, 불행 중 다행히 타고 온 택시가 아직 완전히 떠나지 않아 돌아가려는 택시를 급하게 붙잡아 주소지 잘못 입력했다고 이실직고하고, 원래 가려던 호텔로 가주시라 부탁드렸다. 다행히 기사님도 아시는 곳이라 한 시름 놓았지만, 진땀을 흘리며 여기에 날린 택시비를 속으로 계산하며 원래 호텔로 향했고 눈물을 머금고 두 번째 택시비를 지불했다. 닭은 제대로 확인도 안 했냐고 비난했지만, 할머니는 덤덤하게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실수도 할 수도 있는 거라며 닭의 눈치를 보면서 위로해 주셨다. 할머니는 누가 어떤 실수를 하든 늘 사람이 그럴 수 있다며 화를 내기보다는 괜찮다 해주신다. 어차피 내돈내산. 이런 일도 다 있다고, 무사히 도착한 것만 해도 어디냐 생각하며  온화한 로비로 들어섰다.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하고, 엘리베이터 타고 숙소가 가려던 찰나 할머니가 포토스팟을 발견했다. 허리가 아파 사진을 찍는 걸 크게 즐기시지는 않는 편이시지만, 화려한 조화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의자가 놓인 포토존이 맘에 드셨는지 웬일로 당신께서 먼저 사진을 찍어 달라하셨다. 우리가 사진 찍자고 하면 브이나 코리아하트 등 포즈를 잘 취하시지만, 본인이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 하신 적 없는 할머니가 먼저 말을 꺼내시니 반갑기도 했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마음으로 찍어달라 하신 지 짐작이 될 것 같기도 해서.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은 건 즐거운 일이지만 이상하게 왠지 속상한 마음도 함께 들었다.


이번 숙소는 바다와 저 멀리 섬들과 배들이 보이는 오션뷰 호텔이었다. (가본 경험은 아직 손에 꼽긴 하지만) 할머니는 사실 호캉스를 좋아하신다. 호캉스는 요즘 MZ, 소확행이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생각해 보면 호캉스야 말로 어르신 특화가 아닐까 싶다. 편안하게 앉아 있어도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바다와 숲 속 같은 풍경을 볼 수 있고, 편의시설이 있고, 청소의 의무감에서 벗어난 채 청결하고 폭신한 침구에서 푹 쉴 수 있다. 이번 숙소도 그렇게 비싼 곳은 아니었지만, 할머니와 갔던 곳 중에서는 손에 꼽게 깔끔하고 좋았던 곳이라 할머니께서 좋아하셨다. 할머니랑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야 할머니가 호텔에서 보내는 하루도 생각보다 꽤나 즐기신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엔 침대가 없는데, 그래서 침대를 안 좋아하신 줄 알았던 할머니는 숙소 침대에 눕자마자 드르렁 코골골 송을 부르시며 잘 주무신다. 실은 침대가 편하고 좋으시단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객실 소파에 앉아 한창 바깥 구경을 하셨다. 그래서 숙소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바다를 바라보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많다. 저녁은 음식 배달시켜 먹고, 이렇게 첫째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무사히 숙소에 온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던 여수에서의 첫날. 비가 이따금씩 많이 내려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오후에는 비가 그쳐서 바다도 실컷 볼 수 있었던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던 첫날. 실수는 했지만 함께여서 든든했고 즐거웠었다.


 


# 에필로그

어렸을 땐 무거운 채소들을 번쩍 짊어지고 가시는 할머니 등이 엄청 넓어 보였는데 이렇게 할머니 뒷모습을 볼 땐 귀엽다 느껴질 정도로 이렇게 원래 작으셨던 건지 아니면 작아지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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